러시아의 '가정폭력 조장' 법 통과 과정을 살펴보니, 문화의 차이도...
러시아의 '가정폭력 조장' 법 통과 과정을 살펴보니, 문화의 차이도...
  • 이진희
  • jhnews@naver.com
  • 승인 2017.02.25 05:5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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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국가의 문화를 이해하는 데는 가끔 '글로벌스탠더드'가 걸림돌이 되기도 한다. 러시아를 잘 안다는 전문가도 얼마전 '푸틴 대통령이 가정폭력을 조장하는 법안에 서명했다'는 외신 보도를 '가부장적 문화'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치부했다. 그 속에 숨은 문화적 차이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것이다. 

러시아 출신 방송인 일리야 벨랴코프는 한 언론 기고에서 "개인적으로 이 법안에 찬성하지는 않지만, 그 내면에 숨은 몇가지 오해를 풀어야 한다"며 입법 과정을 설명했다. 외국인으로서는 그 숨은 과정을 알아내기가 쉽지 않다. 외신의 현지 특파원은 취재를 통해 분명히 그 과정을 알 수 있었겠지만, 그 보다는 '글로벌 스탠더드'를 먼저 내세워 '푸틴 대통령이 때리는 법안에 서명했다'는 기사를 타전했을 것이라고 본다. 

벨랴코프가 설명하는 입법 과정과 그속에 숨은 러시아의 가정 문화는 이렇다. 
우선 이번 법안은 '가정 폭력'에 대해 법적 처벌을 폐지한 게 아니라 처벌의 효율성을 높이기 위해 형사법이 아닌 행정법으로 규제 수단을 옮기자는 것이다. 이 법안을 제출한 집권여당 통합러시아당이 설명하는 입법 취지다. 벨랴코프는 "러시아 지방도시에서 일어난 한 사건이 이번 입법의 직접적 계기가 됐다는 점에서도 어느 정도 설득력을 갖는다"고 했다.

사건은 러시아 동부의 페름에서 한 집안의 12세 딸이 엄마 가방에서 몰래 돈을 훔치면서 시작된다. 화가 난 엄마는 딸에게 엉덩이를 몇차례 때렸고, 딸은 이혼한 뒤 따로 사는 아빠에게 이를 알렸다. 아빠는 전처에게 복수할 겸 즉각 경찰에 신고했다.

그러나 러시아 형사법에 따르면 경찰은 경범죄의 경우, 확실한 물적 증거를 제시해야 신고를 접수한다. 엄마가 딸을 때렸다는 확실한 근거가 없으니 범죄 신고 자체가 성립되지 않았다.(혹시 엉덩이에 멍이 든 사진을 제출했으면 또 다를 수 있다).

이 사건은 언론 보도를 통해 사회적으로 반향을 일으켰고, 집권 여당 의원들의 생각은 '이같은 가정 폭력 사건은 신고조차 불가능한 현 형사법 규정을 감안해 가정 폭력을 행정법의 규율 아래로 옮겨 처벌해야겠다"는 것이었다. 행정법은 목격자 증언이나 간접 증거를 근거로 신고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결과적으로 러시아의 가정 폭력은 통제하기 쉬워진 것은 사실이다.

벨랴코프 본인을 비롯해 이 법에 반대하는 사람들의 시각은 물론 다르다. 과거에는 형사법에 걸릴 정도로 심한 가정 폭력의 범죄자는 엄한 처벌을 받았으나 행정법으로 바뀐 이상 기껏해야 벌금형이다. 힘이 약한 아내나 아이를 때리는 가정폭력을 행사한 가장은 이제 벌금만 내면 그만이라는 생각을 하게 되면 가정 폭력이 늘 수밖에 없다. 어쩌면 범죄와 처벌 사이의 균형성이 깨졌다고 할 수 있다. 

또 초범에 대해서는 벌금형조차 부과하지 않는 점이 문제다. 벨라코프는 "반복적 가정 폭력은 단죄하지만, 처음 한 번은 눈감아 주자는 완화책은 결국 가정폭력을 허용하는 것과 마찬가지라는 주장이 나온다"고 지적했다.

이 주장에 대해 집권 여당이 내놓은 답이 바로 러시아 가정의 전통 문화다. 
그는 "러시아에서는 전통적으로 가정 안의 일은 가정 안에서 해결돼야 한다고 생각하는 경향이 강하다. 국가가 가정의 문지방을 넘어 가족 사이의 일에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게 오랜 상식이었다. 남자와 여자가 가정을 이루어 그 안에서 아이를 키우고 갈등을 해소하는 방법은 그 가족의 사생활이어서 국가가 간섭할 수 있는 영역이 아니라는 게 러시아 사람들의 보편적 생각이다. 남편이 바람을 피울 경우 아내가 남편을 용서하든 화가 나서 집에서 쫓아내든, 이는 둘 사이의 문제일 뿐 외부로 악영향을 미치지 않는 한 국가는 물론이고 다른 사람도 관여하면 안 된다는 게 러시아 전통의 가족관"이라고 설명한다. 

"이런 사고가 보수적이라고 비판할 수 있을지는 몰라도, 오랜 문화인 만큼 쉽게 바꾸기 어렵다"는 게 벨랴코프의 솔직한 생각이다. 푸틴 대통령이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할 수 있음에도 거부권을 행사하지 않은 이유도 바로 그것이다. 하지만 벨랴코프는 러시아도 글로벌 스탠더드에 맞춰 오랫동안 내려온 문화도 이제는 바꿔야 한다고 주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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