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와 구 소련 공화국의 갈등의 내면을 보면/동아일보 펌
러시아와 구 소련 공화국의 갈등의 내면을 보면/동아일보 펌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06.05.25 06: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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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3일 우크라이나의 수도 키예프에 ‘구암(GUAM)’으로 불리는 그루지야, 우크라이나, 아제르바이잔, 몰도바 등 4개국 정상이 모였다. 모두 옛 소련권 국가로 러시아의 영향력에서 벗어나려고 애쓰는 국가들이다.

정상회의에서는 러시아에 대한 갖가지 성토가 이어졌다. 탈(脫)러시아, 친(親)서방 정책을 취하면서 러시아로부터 다양한 압력에 시달리고 있는 탓이다. 우크라이나는 가스 공급 가격을 몇 배나 올리겠다는 러시아의 제의를 거부했다가 새해 첫날 영하 20도의 날씨에 가스 공급이 끊기는 곤욕을 치렀다.

2003년 민주화 시민혁명인 ‘장미혁명’을 성공시켜 정권 교체를 이룬 그루지야. 옛 소련권에 민주화 열풍을 가져왔다는 자긍심이 대단한 나라이지만 1인당 국민총소득(GNI)은 1000달러를 조금 넘을 뿐이다. 카스피해 유전 개발로 ‘대박’이 터진 이웃 아제르바이잔과 달리 지하자원이 별로 없기 때문이다.

그루지야의 특산물은 포도주와 ‘보로조미’로 불리는 생수(미네랄워터)뿐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런데 최근 포도주와 생수의 수출길이 막혔다. 최대 수입국인 러시아가 전면 수입금지 조치를 내렸기 때문이다. 말로는 살충제 등 인체에 유해한 물질이 검출됐기 때문이라고 하지만 정치적 압력이란 해석이 지배적이다. 그루지야의 국내총생산(GDP)이 이번 사태로 1%가량 줄어들 것이라는 분석이 나올 만큼 그루지야가 받는 타격은 크다.

러시아는 몰도바산 포도주 수입도 금지했다. 몰도바도 그루지야와 같은 가난한 농업국이다. 초강대국 러시아가 인구 500만 명 안팎의 주변 소국을 다루는 방법을 보면 속이 너무 좁다는 생각도 든다. 강대국의 체면과 아량은 어디에서도 찾아보기 어렵다.

하지만 알고 보면 대국의 행태는 언제나 이와 비슷했다.
국익이 걸린 문제라면 아무리 사소해 보여도 모든 수단을 동원해 해결하려 한다. 국제사회의 눈총이나 비난쯤은 신경 쓰지도 않는다.

최근 조지 W 부시 미국 대통령의 일방주의 외교 행태가 세계적인 반발을 일으키고 있지만 미국은 꿈쩍도 하지 않는다. 게임의 승자가 되면 그뿐이기 때문이다.

강대국의 욕심은 끝이 없다. 그렇게 국토가 넓은 러시아지만 한 뼘의 땅도 양보하는 법이 없다. 심지어 19세기에 쓸모없는 땅으로 본 알래스카를 미국에 거저 주다시피 헐값에 넘긴 일을 아직까지 아쉬워하는 판이다. 이런 마당이니 옛 소련 국가들은 러시아의 눈치를 보지 않으면 안 된다.

분단된 한반도는 이처럼 대국주의와 패권주의로 무장한 강대국 네 나라에 둘러싸여 있다. 북한을 집요하게 압박하는 미국과 고구려 역사를 자국사의 일부로 편입하려는 중국, 그리고 러시아와 일본. 이런 강대국들을 맹목적으로 성토해 봤자 무슨 소용이 있을까. 한편에서는 힘으로 맞서 보겠다는 유사(類似) 대국주의도 나온다.

‘강성 대국’을 앞세운 북한식 허장성세가 대표적이다. 주체사상을 내걸고 “우리 식대로 살겠다”거나 “조선이 세계에서 제일이다”는 허황된 유사 대국주의를 추구한 결과는 비참한 현실이다.

“우리도 할 말은 하겠다”는 속 시원한 선언이나 ‘동북아 균형자 역할론’ 등 한국 정부의 주장은 강대국의 벽에 갇힌 현실에서 돌파구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볼 수 있다. 하지만 자칫 과대망상이나 냉엄한 외교 현실을 외면한 순진한 발상이 될 위험도 크다.

강대국의 각축장이 됐던 1세기 전 대한제국 말과 자주 비교되는 것이 오늘날 한반도의 상황이다. 생존과 통일을 위해서는 대국주의의 본질과 대응책부터 냉철한 자세로 연구해 봐야 하지 않을까.

김기현 모스크바 특파원 kimkihy@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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