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의 공업화 산업화가 어려운 이유는?
러시아의 공업화 산업화가 어려운 이유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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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7.23 21: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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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의사 지바고'에서 지바고가 프랑스 유학을 다녀 온(서구화된) 토냐와 러시아를 벗어나 본 적이 없는(서방세계의 자본주의에 '오염'되지 않은) 라라 사이에서 갈등하는 장면을 기억하는가.

이는 러시아를 서구화방식으로 근대화 할 것인가,러시아 고유의 길을 갈 것인가에 관해 고민하던 19세기 러시아 지식인의 모습을 형상화한 것 같다.

이와 관련하여 러시아가 서유럽에 속하는가,아닌가에 관한 논쟁도 그들 사이에서 끊이지 않았다.

실제 러시아 역사에는 이에 쉽게 답하기 어려운 요소가 있었다.

18세기 초 피터대제 시대에 러시아도 절대왕정을 성립시키지만 서유럽 유형과 달리 군사독재적 성격이 강한 왕정이었다. 그의 서구화 노력이나 관심은 자신도 서유럽 군주처럼 세련된 군대를 갖기 위한 소망에서 비롯된 것이었다.

캐더린 여왕도 러시아에 서유럽문화를 접목시키고자 애썼다. 그러나 푸가초프 농민반란을 계기로 체제개혁을 포기하고 귀족에게 절대적인 농민통제권을 부여하며 억압적 농노제를 강화했다.

공업화를 하려면 농촌을 떠나 공장으로 이동할 유동인구가 필요하다. 하지만 19세기 중엽까지도 러시아 인구의 대다수는 토지에 결박되어 영주에게 노동부역과 화폐지대를 바치는 농노였다. 크림전쟁 패배를 계기로 근대화의 필요성이 부각되자 알렉산더 2세는 농노해방령을 선포한다(1861년). 이는 군대를 재조직하기 위해 국가가 농민을 직접 통제할 필요에서 취해진 것으로 공업화를 위한 조치는 아니었다.

하지만 결과적으로 공업화를 위한 전제조건이 마련되었다. 그런데 오스트리아 농지개혁(1848년)과는 대조적으로 러시아는 농노에게 떠날 수 있는 비용을 너무 높게 부과했다. 그래서 이들이 땅을 벗어날 수가 없었다.

토지개혁에서 농민에게 분배한 규모는 너무 작아 농업을 영세화했다. 토지소유방식은 집단적이었다. 생산물량 가운데 국가에 지불될 몫을 촌락가구 전체가 단체로 책임졌다. 이 조치를 취한 정부의 목적은 이 방식을 통해 촌락을 사회의 한 단위로 정착시키고 토지없는 농민층 생성을 방지하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실제로는 농민을 토지에 더욱 결박하고 도시에서 일하던 농노까지 촌락으로 유입시켰다.

따라서 공업노동자를 배출하기는커녕 오히려 이를 저해했다. 이러한 상황에서 노동절약적 기술혁신을 이루기는 어려웠다. 농업생산성도 향상되지 못해 농민경제는 불안했다. 토지가치는 1차대전 때까지 계속 상승했으나 소출에 따른 자본가치와 무관한 상승이었다. 따라서 공업화면에서 개혁효과는 제한적이었다.

러시아에는 예로부터 공업화가 가능하거나 바람직하지 않으며 농업만으로 살 수 있다는 주장도 분분했으나 여하튼 공업화가 진전된다. 특히 1890년 무렵 직물업뿐만 아니라 주로 군사력에 도움이 되는 중공업,운송에서 성과를 거뒀다. 핵심지도자는 세르게이 비테(1892~1903년 재무장관 재임)다. 독일의 리스트(F.List)에게서 영향받은 그는 산업후진이 국가위상을 위협한다는 생각에서 공업화를 적극추진했다.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유럽기술과 자본을 대거 유치하고 금본위제를 도입했다. 시베리아횡단 철도건설, 우크라이나의 철,석탄공업 육성,유치산업을 위한 높은 보호관세 도입 등도 그가 한 일이다.

1900년 무렵 러시아의 철생산은 미국 독일 영국 다음으로 많았고 석유공업은 미국에 근접했으며,세계 석유의 절반 정도를 생산하고 정제했다. 여전히 대다수 인구는 농민이었으나 짜르 독재체제는 특정 공업화면에서 서방세계를 따라잡기 시작한 것이다.

1900년 러시아는 불황을 겪는다. 원인은 과잉생산, 금융붕괴 등이 거론되지만 높은 세금에 시달리느라 농촌인구가 고갈된 탓이 가장 컸다. 1905년 혁명 이후 스톨리핀(P.Stolypin) 총리는 농업개혁을 추진했다. 촌락에 속한 집단토지소유권을 제거하고 좀더 기업가적인 농민을 지원해 부농(Kulak)이 부상할 수 있게 했다. 농민생활, 소비가 다소 호전되었다. 농민재산처분권, 이주권도 이 때 최초로 생겼다. 공업화의 주도권이 정부에서 은행으로 넘겨졌다. 이제 정부주도를 완화하는 것이 공업화에 유리한 상황이 조성되면서 적어도 1914년까지는 독일과 유사하게 시장경제가 발달해갔다.

경제사에서 일반적으로 러시아는 공업화의 선행조건을 정부가 마련하고 유도한 국가로 분류된다. 러시아는 러시아혁명 발발 전까지는 서유럽공업국의 대열에 설 수 있는 면도 있었다. 하지만 외국자본,기술자 등을 마구 끌어다 전략적으로 특정산업(군수산업)에 집중시키면서 국민의 생활수준의 향상과는 무관하게 기형적 발전을 하는 것이 과연 바람직한 공업화 방식일까. 더구나 러시아는 외국에서 빌린 돈을 제대로 갚아 본 적도 없는 것 같다.

양동휴 서울대 교수(경제학) dyang@snu.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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