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8일은 구소련 쿠데타 15주년인데...
지난 18일은 구소련 쿠데타 15주년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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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6.08.20 1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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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월18일은 구 소련의 운명이 결정된 날이다. 군사쿠데타가 발생하고 민중이 이에 맞서면서 구 소련의 공산당은 종말로 가게 된다. 그 날을 기억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그날 탱크위에 올라간 옐친 전 대통령은 기억하지만, 고르바초프는 기억하지만 그날 자체는 기억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그날에 대한 기억을 동아일보는 에따 러시아라는 코너에서 이렇게 썼다..

“지구상에서 북한과 쿠바 빼고 공산당에 대한 관심이 남아 있는 나라가 어디 있겠습니까.”

18일 오전 9시 모스크바 중심가인 트베르스카야 거리 푸시킨 동상 앞. 맥도널드 햄버거를 들고 출근하던 트리트리 니콜라예비치(35)씨는 “15년 전의 쿠데타에 대한 관심이 없다”며 이렇게 말했다. 그는 “회사에 지각하겠다”며 급히 발걸음을 옮겼다.

15년 전인 1991년 8월 19일, 이 거리에는 수만 명의 군중이 몰려나와 공산당 보수파 쿠데타 세력의 탱크에 맞섰다.(**여기서 부분 첨가, 이 거리에도 사람이 몰렸지만 핵심 지역은 역시 구소련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궁이었던 화이트 하우스 앞 거리다. 화이트 하우스 주변에 사람들이 몰렸고, 그 현장에 옐친이 탱크위에 올라가 국민저항을 역설했다)

미하일 고르바초프 당시 소련 대통령으로부터 권력을 빼앗으려 했던 쿠데타가 ‘3일 천하’에 그치는 바람에 소련공산당(CPSU)은 소비에트연방의 ‘몸통’인 러시아공화국에서 합법적인 활동을 중단해야만 했다. 이후 보리스 옐친 당시 러시아공화국 대통령은 사회주의를 버리고 자유주의 개혁을 추진했으며 1991년 12월 8일 소련의 해체를 선언했다.

소련 해체 이후 자본주의 개혁이 급물살을 탔지만 급진 개혁은 적지 않은 부작용도 낳았다. 사유화와 가격 자유화로 서민들은 한 해 최고 2000%가 넘는 슈퍼인플레이션과 극심한 빈부격차를 겪었다. 간판을 내렸던 공산당 잔존 세력들은 이 틈을 타 당명을 ‘러시아연방공산당(CPRF)’으로 바꾸었고 오늘날 정부의 실정을 꼬집는 야당 역할을 하고 있다.

이처럼 15년간 변화가 무쌍했던 역사 때문인지 푸시킨 동상 근처에서 만난 모스크바 시민 10명 중 9명은 공산당 통치의 마지막 순간을 기억조차 하지 못하거나 대답하는 것을 기피했다.

러시아국영 여론조사 기관인 VTsIOM도 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저조해 여론조사를 중단했다고 영자지 모스크바타임스가 보도했다. 이 기관은 “시민 대부분이 3일 쿠데타를 이제는 정치적으로 중요한 사건으로 생각하지 않는다”고 설명했다.

또 다른 여론조사 기관인 레바다는 “응답자의 75%가 쿠데타 주도 세력이나 저항 세력에 관심이 없었다”고 발표했다.

정치권의 반응도 마찬가지다. 10여 개 정당 가운데 우익연합(SPS)만 탱크를 몸으로 막다가 숨진 3명의 민간인 희생자를 위한 집회를 열 계획이다.

소련 붕괴를 ‘20세기 최대 비극’이라고 말했던 블라디미르 푸틴 러시아 대통령은 러시아 남부 소치에서 독립국가연합(CIS) 정상회담에 참석하고 있다. 5년 전 10주년 행사에 참가했던 고르바초프 전 대통령은 아예 해외 출장을 떠나 러시아에 없다. 옛 소련의 붕괴 순간은 이렇게 화석처럼 변해 역사의 뒤안길에 묻혀버린 듯했다.

모스크바=정위용 특파원

역사는 기록이다. 그 기록을 다시 되돌아보는 것은 즐거움도 되고 회한도 된다. 고르비는 회한으로, 옐친은 즐거움을 돌아보는 것일까? 그럼 진짜 중요한 민중들은? 한마디로 무관심이다. 그만큼 러시아가 변했고, 의식도 바뀌었다는 뜻이다. 그때 개혁파 세력으로 떵떵거렸던 사람들 중에서 아직도 남아있는 사람은 별로 없다. 아이러니다. 그 사람들은 과도기 그 역할에 만족했을 사람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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