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푸틴 대통령의 휴전 본심' 미 NYT 보도에서 국내 언론이 놓친 것들
'푸틴 대통령의 휴전 본심' 미 NYT 보도에서 국내 언론이 놓친 것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12.25 04:3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푸틴 대통령이 현재의 전선에서 우크라이나와 휴전할 용의가 있다는 신호를 지난 9월부터 서방측에 조용히 보내고 있다고 미국 뉴욕타임스(NYT)가 23일 보도했다. 크렘린과 가까운 러시아 전직 고위 관료 2명과 푸틴 대통령 측으로부터 관련 메시지를 받았다는 미국와 국제기구 관료들에 대한 취재를 바탕으로 쓴 기사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rbc 등 러시아 언론에 따르면 드미트리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그러나 "개념적으로 이 보도는 올바르지 않다"고 평가했다. 푸틴 대통령이 겉으로는 큰소리를 치지만, 속으로는 외교채널을 통해 협상 의향을 내비치고 있다는 식의 NYT 접근은 틀렸다는 뜻으로 해석된다.

푸틴, 우크라이나 전쟁 종식에 열려있다는 신호를 조용히 보낸다는 미 NYT의 23일자 보도/웹 페이지 캡처

우선, 러시아는 그동안 우크라이나와의 휴전(혹은 평화협상)을 거부한 적이 없다. 개전 한달 후인 2022년 3월 말 튀르키예(터키) 이스탄불에서 열린 3차 (평화)협상에서 거의 타결된 평화협정(초안)을 걷어찬 것도 우크라이나 측이다. 당시 협상에 참여했던 우크라이나 집권여당 '인민의 종' 다비드 아라하미아 대표도 지난 11월 말 공식적으로 이를 확인했다.

페스코프 대변인은 이날 NYT 보도에 대해서도 "푸틴 대통령은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의 목표는 변하지 않았다'는 푸틴 대통령의 지난 14일 기자회견 발언을 인용하면서 '조건'을 빠뜨리지 않았다. 푸틴 대통령은 연말 기자회견겸 국민과의 대화에서 '우크라이나에서 진행된 거의 2년간의 군사작전을 어떻게 평가하는지, 목표와 목적이 바뀌었는지, 언제 평화가 찾아올 것인지'에 대한 질문에 “특수 군사작전의 목표를 달성하면 평화가 찾아올 것"이라면서 "우크라이나의 비나치화·비군사화·중립적 지위를 겨냥한 당초의 목표는 변하지 않는다"고 답변했다. 

푸틴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러시아는 우크라이나, 유럽, 미국과 협상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공개적으로 말했다. 서방 측에서 협상 이야기가 나오면, "대화할 의지가 진짜 있다면, 2022년 가을 모스크바와의 협상을 금지한 우크라이나의 법안(의회 채택후 젤렌스키 대통령 서명/편집자)을 먼저 취소하는 게 순서"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러시아는 오직 러시아의 이익에 따라 행동할 것"이라고 강조하곤 했다. 러시아의 이익은 말할 것도 없이 특수 군사작전의 목표 달성이다. 

지난 14일 기자회견겸 국민과의 대화에서 질문에 답변하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가장 최근에는 세르게이 라브로프 러시아 외무장관이 이달 중순 서방 측의 고위 대표들이 우크라이나 문제와 관련해 모스크바와 접촉을 시도하고 있다고 공개하기도 했다. 이에 대한 러시아측 태도도 다르지 않았다. "다른 나라(러시아)의 안보를 희생하면서 자국(우크라이나)의 안보를 확보하려는 시도(나토 가입)를 종식시키는 데 관심이 있는 국가들과 대화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했다. 

문제는 휴전이든 협상이든 접촉의 선제 조건이다. 러시아의 목표는 이미 분명하고, 우크라이나는 러시아군의 철수를 내세우고 있다. 전황이 어느 한쪽으로 급격히 기울지 않는 한, 서로의 조건을 철회할 가능성은 희박하고, 따라서 협상을 위한 접촉은 현실적으로 거의 불가능하다. 

오랫동안(1993년~2008년) 친서방 성향의 야당 '야블로코'를 이끈 그리고리 야블린스키는 최근 푸틴 대통령에게 "우크라이나와의 휴전 중재자로 나서겠다고 제안했지만, 동의를 받지 못했다"며 "러-우크라 어느 쪽도 휴전에 대한 준비가 되어 있지 않다"고 말했다. 

이같은 상황에서 푸틴 대통령이 '휴전에 열려 있다'는 신호를 조용히 보낸 것(NYT 보도가 맞다면)은, 우크라이나를 자극하지 않으면서 휴전에 응하도록 압박을 가해 달라는 의사 표현으로 보는 게 적절하다. 조건은 그동안 누차 제기된 '한국식 시나리오'다. 현 전선에서 모든 전투를 중지하는 것이다.

눈덮힌 우크라이나군 참호/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NYT에 따르면 올해 가을 러시아 최고위 관료를 만났다는 한 국제기구 관리는 "러시아는 현재 우크라이나 점령지에 그대로 남아 있는 상태에서 휴전하기를 원한다"고 말했다. 푸틴 대통령의 본심은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영토 일부를 점령한 것에 만족해하며 승리를 선언한 후, 전쟁을 끝내고 싶어한다고 NYT가 분석한 이유다.

그렇다면, 러시아가 군사작전의 목표를 철회한 것일까? 페스코프 대변인의 발언으로는 절대 아니다. 우선 교착상태에 빠져 '허망한 소모전', 혹은 제1차 세계대전과 유사한 '참호전'으로 들어간 전쟁을 일단 중지한 뒤, 비나치·군사화, 중립적 지위 등을 논의하자는 뜻으로 읽힌다. 세계 평화 문제를 연구하는 미국의 비영리 초당파 싱크탱크인 스팀슨 센터(Stimson Center)도 지난 21일 러-우크라-서방간의 평화협정 체결 과정이 몇 단계로 나눠 진행될 것으로 내다봤다. 휴전및 휴전 감시 그룹 결성→우크라이나의 나토(NATO) 가입 등 평화협정 핵심 문제 타결→유럽의 새 안보체제 구축의 순이다. 

NYT 보도에서 주목을 끄는 대목은, 푸틴 대통령이 지난해 가을부터 휴전 협상 가능성을 타진해왔다는 점이다. 지난해 가을이라면, 우크라이나군이 북부 하르코프(하르키우)와 남부 헤르손 등지에서 러시아군 점령지역을 탈환하며 기세등등하던 시절이다. 수세적 입장에 처한 러시아는 내심 휴전이 간절했겠지만, 우크라이나가 이에 동의했을 리 만무하다.

당시, 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도 현재의 전과가 '합리적 기대치'라고 판단해 키예프(키이우)에 협상을 촉구했으나, 젤렌스키 대통령은 이를 거부했다고 NYT는 썼다. 다른 미국 고위 관리들도 협상이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 

설리번 미 백악관 안보보좌관-마크 밀리 미 합참의장과 통화하는 예르마크 우크라 대통령 실장-잘루즈니 군총참모장의 모습. 이들은 수시로 미국 파트너들과 우크라이나 전선 상황과 서방의 지원 방안 등을 논의했다/사진출처:예르마크 텔레그램

NYT에 따르면, 휴전 협상의 기대가 사라진 뒤 푸틴 대통령은 특수 군사작전 지휘부와 하루 두 차례씩 화상회의를 갖고 전황을 논의했다. 또 세르게이 쇼이구 러시아 국방장관은 "푸틴 대통령은 전투를 계속할 의지가 있으며, 러시아가 탱크와 전투기 등에서 우위를 점하고 있고, 생산을 더 늘릴 계획도 있다"고 큰소리쳤다. "필요하다면 최대 2,500만 명까지 동원할 수 있다"고도 했다. 

동시에 크렘린은 '때가 되면' 활용하기 위해 가능한 '협상 채널'을 미리 만들려고 노력했다는 게 NYT 지적이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6월 아프리카 국가의 지도자들을 모스크바로 초청한 게 대표적이다. 그들은 모스크바를 거쳐 키예프로 날아갔다. 푸틴 대통령은 아프리카 대표들과의 만남에서 2022년 3월 이스탄불에서 합의된 '협정 초안'을 공개하며 협상 의지를 거듭 표명했다.

아프리카 대표단과의 회의에서 이스탄불 평화협정 초안을 내보이며 우크라이나측에 협상을 촉구하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현지 매체 영상 캡처 

그러나 지금은 지난해 가을과 상황이 달라졌다. 우크라이나가 여름철 반격에 실패한 뒤, 러시아가 거의 모든 전선에서 역공에 나선 상황이다. 서빙의 대(對)우크라 지원 의지도 과거에 비해 많이 식었다. 팔레스타인 하마스-이스라엘 충돌도 우크라이나에게는 불리한 국제정세다. 푸틴 대통령은 자신감을 되찾았고, 러시아 주요 관리들도 처음에 재앙으로 여겼던 전쟁에 익숙해졌다고 NYT는 짚었다.

그럼에도 크렘린이 전쟁을 종식(휴전)하려는 주된 동기는, 푸틴 대통령이 대다수 러시아인들에게 정상적인 삶과 일상을 돌려주고 싶기 때문이라고 NYT는 전했다. 이 매체는 "비공식 러시아 특사들은 (서방의) 대화 상대와 푸틴 대통령이 수락할 협상안의 윤곽까지 논의했다"고 밝혔다. 미국과 유럽이 '우크라이나의 양보 가능한 선'을 논의했다는 지난 11월 초 미 NBC방송 보도와 같은 선상에 있다.

NYT는 '크렘린이 내년 미 대선에서 트럼프 전 대통령의 승리를 기대하며 전쟁을 계속할 것'이라는 서방의 주장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는 러시아 전 고위 관리의 말을 소개하기도 했다. 전쟁에 내재된 불확실성을 고려할 때, 전선의 현 교착상태는 크림반도로의 육로를 확보하고 4개 지역을 합병한 러시아가 승전을 선언하며 전쟁을 끝낼 수 있는 호기라는 분석에서다. 지난해 3월 말에 거의 합의된 이스탄불 초안이 협상의 시작점이 될 수도 있다.

지난해 3월 이스탄불에서 열린 러-우크라 협상장 모습/사진출처:주이스탄불 러시아총영사관

NYT의 인터뷰에 응한 한 소식통은 "크렘린과의 거래를 위한 이상적인 시기는 내년 3월로 예정된 러시아 대통령 선거 전이 될 것"이라고 했고, 미국 관리들은 "러시아가 서방의 구체적인 제안을 기다리고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지난 19일 연말 기자회견에서 러시아와의 협상은 (아직 시기적으로) 부적절하다고 말했다. 

NYT가 분석한 가장 큰 걸림돌은 우크라이나의 나토 가입 불가 조건이다. 우크라이나의 어떤 주요 정치인도 국민 정서를 고려할 때, 러시아에 영토를 양보하는 협상에 동의하지 않을 것이라는 점도 접촉을 어렵게 만든다. 마지막으로 푸틴 대통령을 압박하려는 미국의 태도도 무시할 수 없다. 우크라이나의 평화는 이 모든 걸림돌을 극복해야만 가능하다. 러-유럽-미국이 서로 눈치를 보는 이유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