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후 국제질서 파괴한 나토의 유고 공습 25주년, 우크라 전쟁의 '판도라 상자' 열었다?
전후 국제질서 파괴한 나토의 유고 공습 25주년, 우크라 전쟁의 '판도라 상자' 열었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4.03.28 00: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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판도라 상자는 누가 열었을까? 그리스로마 신화에서는 호기심 많은 인류의 첫 여성 '판도라'다. 전후 세계 질서를 깨뜨리는 '판도라 상자'는?

미국과 유럽연합(EU) 등 서방 측은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이 무력으로 전후 국경선 변경을 시도할 수 없다는 '유엔 헌장'을 위반했다고 거세게 비판하지만, 세계의 절반('글로벌 사우스'·남반구 신흥국가군)은 전적으로 수긍하지 않고 있다. 

안토니우 구테흐스 유엔 사무총장은 우크라이나 전쟁 2주년(2024년 2월 24일)을 앞둔 23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 회의에서 "러시아의 전면적인 우크라이나 침공은 유엔 헌장과 국제법에 정면으로 위배된다"며 "러시아는 식민지 시대에 멋대로 그어진 국경선을 지금까지 존중하고 유지해온 아프리카 국가들을 본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구테흐스 총장의 이같은 발언에 공감하지 못하는 '글로벌 사우스'는 전후 세계질서를 무너뜨린 첫 사건으로 1999년 미국 주도 나토(NATO)군의 유고슬라비아(이하 유고, 당시 유고 연방 구성 6개국중 4개국 독립/편집자) 공습을 든다. 꼭 25년 전 이야기다. 

구테흐스 유엔사무총장과 악수를 나누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가제타ru 등 러시아 매체에 따르면 유고의 후신인 세르비아의 수도 베오그라드에서는 24일 나토의 공습에 반대하는 대규모 집회가 벌어졌다. 이날은 나토군이 25년 전 유고 공습을 시작한 날이다. 시위대는 '나토-파시스트에게 죽음을!, '제국주의에 ​​죽음을!' 등을 적은 피켓을 들고 거리로 나왔고, 희생자 수천 명의 넋을 기리기 위한 추도식이 나토군의 폭탄이 처음 떨어진 남부 프로쿠플레에서 열렸다. 알렉산다르 부치치 세르비아 대통령이 추도식에 직접 참석했다.

◇ 전후 국제질서는 어떻게 무너지기 시작했나?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이날 '(유고의 수도) 베오그라드 공습. 규칙 기반 세계질서는 25년 전 어떻게 무너지기 시작했나'(Наковальня для Белграда. Как 25 лет назад начал разрушаться "миропорядок, основанный на правилах)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나토군의 유고 공습 작전이 전후 국제질서 개편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상세히 분석했다.

나토군을 이끈 미국은 3·24 유고 공습을 공식적으로 '연합군 작전'(Operation Allied Force, 여기서 연합군은 나토군/편집자)으로 명명했다. 별칭으로 'Noble Anvil'(고귀한 모루, 모루는 대장간에서 쓰는 쇠받침대/편집자)로 불렸는데, 유고에서는 이를 (미국의) 'Милосрдни анђео'(자애로운 천사, Merciful Angel)로 오역하며 비꼬았다. 유고에서는 지금도 이 표현이 주로 쓰인다고 한다. 

'연합군 작전'의 명분은 유고의 세르비아 공화국내 자치주인 코소보에서 인종 청소와 전쟁 범죄, 알바니아계 주민들에 대한 폭력 행위를 막기 위해서다. 직접적인 계기는 ‘라차크 학살’ 사건이었다. '라차크'는 코소보 독립 투쟁을 벌이던 코소보 해방군(KLA, 알바니아어로는 Ushtria Çlirimtare e Kosovës, UÇK)의 본거지다. 유고 군경(민병대 포함)이 KLA 소탕을 목적으로 '라차크'로 진입해 무고한 민간인들까지 대량 학살했다는 게 나토측 주장이다.

유고의 주요 도시를 겨냥한 나토군의 무자비한 공습은 1999년 3월24일부터 6월10일까지 두달 반 가까이 단행됐다. 그 결과, 유고는 코소보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고, 코소보는 미국 등 서방 국가들의 지지를 받고 독립을 선언했다. 

나토의 유고 공습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F-15C 이글 전투기/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러나 나토의 공습은 발칸반도와 유럽 대륙을 넘어서는 지정학적 변화를 초래했으며, 우크라이나 사태도 그 흐름 속에 속해 있다고 스트라나.ua는 지적했다. 공습은 곧바로 러시아 내 반서방 정서를 촉발시켰고, 소련 붕괴후 친서방 외교 노선을 선택했던 보리스 옐친 대통령 등 당시 러시아 지도부로부터 반감을 불러일으켰다는 것이다. 당시에는 러시아가 힘이 약해 대놓고 대들지 못했지만, 나토의 군사작전은 언제든지 러시아 안보를 위협할 수 있다는 중요한 교훈을 남겼다는 설명이다. 

실제로 소련 붕괴와 시장경제 도입에 따른 혼란과 어려움에 직면한 러시아는 1990년대 말까지 '슬라브족 동맹국'인 유고에 대한 나토의 공습에 힘으로 맞서거나, 미국과 외교 관계를 단절하는 강수를 둘 수가 없었다. 옐친 대통령은 오히려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를 베오그라드로 보내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유고 대통령에게 나토의 요구를 수용하도록 압력을 가했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나토의 공습이 전후 규칙 기반의 세계질서를 깨뜨리는 첫번째 사건이 됐다는 사실이다. 러시아가 2014년 크림반도 병합 이후 서방의 비난에 대한 대응논리로 드는 게 바로 이 나토 공습이다. 푸틴 대통령이 국가안보를 최우선 가치로 내세우면서 대서방 강경 노선으로 돌어선 데에는 나토 공습이 러시아에 안겨준 불안감이 깔려 있다. 나토는 언제든지 러시아를 공습할 수 있을 것으로 받아들인 것이다. 

◇ 전후 국제질서의 작동 원리는

제 2차 세계대전 이후의 세계질서는 기본적으로 '얄타 회담'(1945년 2월, 한반도 분할 등 전후의 문제 협의/편집자)와 포츠담 회담(1945년 7월, 독일과 일본 처리 문제 논의/편집자)의 정신을 담은 '국경의 불가침'(즉 주권국가) 정신을 바탕으로 세워졌다. 우리가 우크라이나 전쟁 이후 계속 듣고 있는 '전후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다.

이 원칙은 1991년 연방제 국가인 소련과 유고의 해체로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러나 국제사회는 연방을 구성해온 지역의 국경선을 인정하는 것으로, '국경 변경은 안된다'는 전후 질서가 유지된 것으로 받아들였다.

문제는 유고였다. 소련의 붕괴 과정과 달리, 유고에서는 연방을 유지하려는 맏형 세르비아(공화국)과 독립하려는 크로아티아,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 사이에 대규모 전쟁이 터졌다. 세르비아의 패전으로 두 나라는 독립을 쟁취했다. 

그 과정을 본 세르비아 공화국내 자치주인 '코소보'도 독립하겠다고 나섰다. 코보소에서 주류를 이루는 주민은 세르비아계가 아니라 알바니아계 무슬림(회교도)였다. 유고 정부는 당연히(?) 코소보의 분리, 독립을 막았고, KLA의 본거지인 ‘라차크' 학살사건이 벌어졌다. 하지만, 모든 책임을 유고가 지기에는 애매한 부분이 적지 않다. 코소보는 유고 연방을 구성한 공화국이 아니라, 세르비아 공화국의 자치주에 불과했다. 

나토가 '라차크' 사건을 명분으로 유고 공습에 나섰지만, 유엔 안보리의 승인을 받지 않고 무력을 사용했다는 게 가장 큰 약점이었다. 유엔 헌장의 정신은 무력으로 국경선 변경을 시도해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무력 사용은 유엔 안보리의 승인하에서만 평화 유지 수단으로 쓰도록 되어 있다. 나토 공습이 유엔 안보리의 승인을 받지 않은 채 코소보의 독립으로 전후 국경선 변경을 시도했으니, 분명히 유엔 헌장을 위배한 것이다.

그 이유는 분명했다. 거부권을 가진 러시아와 중국이 서방 측의 유엔 결의안을 저지할 것이기 때문이다. 미국과 나토 동맹국은 유엔안보리 상임이사국인 중국, 러시아, 혹은 다른 누구와도 협의하지 않고 국제 규칙의 틀 밖에서 무력을 사용할 수 있고, 앞으로도 사용할 것임을 유고 공습을 통해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 나토의 유엔 안보리 승인 패스 이후 세계는 

유엔 안보리 회의 모습/영상 캡처

미국이 유엔 안보리의 결의(승인) 없이 KLA 진압에 나선 유고를 폭격할 수 있다면, 당시 체첸반군의 제거에 나선 러시아를 항해서도 언제든지 무력 사용이 가능하다는 논리가 성립한다. 또 티베트와 신장 위구르 자치구 사태를 명분으로 중국을 공격할 수도 있다, 하지만 러시아와 중국은 군사적 강대국이었던 만큼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유고는 달랐다. 이미 크로아티아의 독립 전쟁을 통해 군사적 무력함이 만천하에 드러났고, 최대 우방국인 러시아도 미국에 맞설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유고가 공습을 당하더라도, 하소연할 곳도, 군사적 지원을 요청할 곳도 없을 것이라는 게 나토 측의 냉정한 정세 판단이었다.

무력 사용의 단맛을 본 미국은 2003년 또 대량살상무기를 제거한다는 이유로 다국적군을 구성해 이라크로 쳐들어갔다. 러시아와 중국뿐 아니라 동맹국인 프랑스와 독일마저 '규칙에 기초한 세계질서'를 끼뜨리려는 미국의 무력 사용에 반대 의사를 표명했다.

그리고 10년 후인 2014년, 미국과 나토의 일방적인 무력 사용은 부메랑이 되어 우크라이나로 돌아왔다. 러시아는 '코소보의 선례'에 따라 국경선을 변경하는 크림반도의 합병을 정당화했다. 코소보 주민들과 마찬가지로 크림반도의 대다수 주민들은 러시아 연방으로의 편입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또 2022년 9월, 같은 방식으로 우크라이나 점령지 4개 주가 러시아로 편입됐다. 

물론, 1999년의 코소보와 2014년의 크림반도, 2022년의 돈바스(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 상황은 매우 다르다.

코소보의 경우, 갈등의 원인과 그 역사적 기원을 놓고 세르비아인과 알바니아인은 서로 정반대의 주장을 폈다. 분명한 것은 나토의 폭격이 시작된 1999년, 코소보는 엄연히 유고의 영토였다. 국제사회의 어느 누구도 이를 부인하지 않았다. 나토가 코소보에서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학살을 막는다는 이유로 유고를 공습한 것이나, 러시아가 15년 후 돈바스 지역에서 러시아계 주민을 학살하는 우크라이나 나치세력(아조프 민족주의 무장 단체)을 겨냥해 무력을 사용한 것이나 별반 다를 게 없다. 나토의 '유고 공습'이 만든 원죄다. 

스트라나.ua는 "미국이 주도하는 나토의 유고 폭격과 미군 주도 다국적군의 이라크 침공은 '규칙 기반 세계 질서'를 지키기 위해 미국이 러시아의 우크라이나 공격에 맞서야 한다는 주장을 무색하게 만든다"고 지적했다. 누가 '판도라 상자'를 열었는지, 비서방 진영에서는 모두 알고 있다는 이유에서다. 

세월이 흐르면서 몬테네그로가 유고에서 독립하고, 홀로 남은 세르비아의 대(對) 나토 기류도 바뀌었다. 2006년 나토가 주관한 ‘평화를 위한 동반자 관계’에 세르비아는 23번째 국가로 가입했으며, 비정기적으로 나토와 안보 협력 프로그램을 진행해 왔다. 옌스 스톨텐베르그 나토 사무총장은 2023년 11월 부치치 대통령과 회담하면서 나토와 세르비아의 합동 군사훈련 가능성을 논의하기도 했다. 세르비아는 또 끊임없이 유럽연합(EU) 가입을 희망하고 있다. 

하지만, 나토의 공습은 세르비아인들에게 지울 수 없는 트라우마(상흔)를 남겼다. 희생자 추모 집회가 매년 열리고, 세르비아가 끝까지 서방의 대러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것 등이 이를 반증한다. 부치치 대통령도 제재 동참 거부의 이유로 '나토 공습'의 역사적 교훈을 들곤 했다.

푸틴 대통령은 24일 방영된 TV 채널 러시아-1의 다큐멘터리 '베오그라드'에서 "유엔 안보리의 어떤 결의도 없이 직접적인 군사작전(전쟁)을 벌였다"고 나토 측을 비난한 뒤 "그건, 엄청난 비극이며, 그러한 행동을 용납할 수 없다"고 말했다. 

◇ 팔레스타인 역사와 유사한 코보소

유럽의 화약고인 발칸반도에서 코소보 분쟁은 중동의 팔레스타인 문제와 유사하다. 코소보는 원래 세르비아인의 역사적인 고향이자 세르비아 민족의 첫 국가 탄생 지역이었다. 마치 러시아에게 '키예프'(키이우)와 같은 곳이다. 하지만 오스만투르크(오스만 제국)이 이 지역을 장악하면서 세르비아들이 대거 떠나고, 그 자리를 무슬림 알바니아인들이 메웠다. 1913년 발칸전쟁에서 오스만 제국이 패배하기 전까지 무슬림은 이 지역에서 주류적 특권을 누렸다.

발칸전쟁에서 승리한 제정러시아는 코소보를 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에 나눠줬다. 그러나 제1차 세계 대전 이후 발칸반도에는 통일국가인  '세르비아·크로아티아·슬로베니아 왕국'이 출현했고, '남슬라브족의 나라'를 뜻하는 '유고슬라비아 왕국'으로 곧 이름이 바뀌었다.

제 2차 세계대전으로 이 지역은 또 한차례 요동쳤다. 유고를 장악한 나치독일이 코소보를 이탈리아에 넘겨주었다. 이탈리아는 이 지역을 기존의 알바니아령에 편입시켰다. 수십만 명의 세르비아인들이 또다시 짐을 싸 떠나야 했다.

캡처2-나토 유고 공습 티토 dzen.ru
강력한 유고 연방을 건설한 티토 대통령/사진출처:dzen.ru

코소보는 종전 후 유고연방을 구성하는 세르비아 공화국의 자치주로 되돌아왔다. 그러나 패전국 이탈리나 알바니아령에 욕심이 난 티토 유고 대통령은 '코소보의 알바니아화'를 밀어붙였다. 1974년 새 헌법에 따라 코소보의 자치권은 더욱 확대됐고, 급기야 알바니아계 주민들은 스스로 유고 연방을 구성하는 공화국이 되겠다고 나섰다. 기회는 의외로 쉽게 찾아왔다. 강력한 통치권을 행사해온 티토 대통령이 1980년에 사망한 것. 이듬해(1981년) 바로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들고 일어났다. 하지만, 유고의 진압군에 의해 짓밟혔다. 

1980년대 말 권력을 잡은 슬로보단 밀로세비치 세르비아 대통령은 티토 전 대통령이 추진해온 '코소보의 알바니아화'를 폐기하고 '세르비아화'를 선언했다. 세르비아인들의 이주를 독려하고 헌법을 개정해 코소보의 자치권을 크게 축소했다. 알바니아계 주민들이 저항이 시작됐고, 세르비아계와의 충돌은 필연적이었다. 

코소보 알바니아계 공동체는 1991년 유고 붕괴와 함께 세르비아 정부가 인정하지 않은 주민투표를 실시한 뒤 독립을 선언했다. 이웃 국가 알바니아만이 코소보의 독립을 인정했을 뿐, 국제사회는 코소보를 외면했다. 30년 뒤인 2022년 2월, 우크라이나의 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가 'DPR'(도네츠크인민공화국)과 'LPR'(루간스크인민공화국)으로 각각 독립을 선언했고, 러시아에 의해서만 '독립 국가'로 인정받은 것과 하등 다를 게 없었다. 

다만, 유고(세르비아와 몬테네그로)는 크로아티아와 보스니아-헤르체고비나와의 전쟁으로, 코소보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두 전쟁은 1996년에야 유고의 패배로 끝났다. 이 과정을 지켜본 코소보 알바니아계 주민들의 독립 열기는 더욱 거세게 타올랐다. 코소보 해방군(KLA)이 유고 중앙정부 소속 기관과 세르비아계 주민들에 대한 공격을 강화했다. 참다못한 유고 정부는 1998년 KLA를 진압하기 위해 군대를 파병했다.

◇ 코소보의 독립 투쟁과 서방측 지원

서방 측은 즉시 코소보 분쟁에 개입했다. 베오그라드가 군사 작전을 중단할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유고는 그 해 9월 드레니차 지역에서 과감한 군사 작전을 통해 KLA 지도자 한명을 제거했다. 하지만 민간이 80여명이 희생됐다. 

유엔 안보리는 양측에 휴전을 촉구하는 결의안을 채택했다. 그 해 10월 15일 양측간에 휴전협정이 체결되면서 유고는 군대를 철수했다. 

하지만 휴전을 오래가지 않았다. 3개월이 지난 이듬해 1월 KLA는 현지 주둔 유고 보안군에 대한 공격을 재개했다. 베오그라드는 즉각 KLA의 본거지인 '라차크' 마을에 대한 보복을 단행했다. 민간인 피해자가 또 수십명이 나왔다. 

이번에는 나토가 나섰다. 그러나 어느 측도 협상 의지가 없었다. 미국과 영국은 그 해 3월 18일 일방적으로 분쟁 해결 방안을 제시했다. △코소보의 완전한 정치적 자치와 △유고 군대및 경찰 병력의 철수 △나토군 배치 △ 2002년 국민투표를 통한 코소보의 지위 결정 등이다.

누가 봐도 유고에게는 무리한 조건이었다. 유고는 3월 23일 이 제안을 거부했다. (유엔 헌장에 규정된) 규칙 기반 질서의 정신에 따르더라도, 자국(유고) 영토의 일부 지역에 외국 군대가 진주하고, 독립(국경선 변경)을 위한 국민투표를 실시하도록 한 중재안은 거부하는 게 당연했다.

나토는 이 안을 내기 전에 다 생각이 있었다. 바로 무력 개입이다. 유고가 중재안을 거부한 바로 다음날(3월 24일), 나토 전폭기들이 유고 상공에 나타났다. 하비에르 솔라나 나토 사무총장이 유럽 주둔 나토군 사령관인 웨슬리 클라크 장군에게 군사작전을 명령한 것이다. 유엔 총회, 유엔안보리, 유고에 대한 사전 경고도 일체 없었다.

나토의 유고 공습/사진출처:위키피디아

그날 저녁, 베오그라드와 코소보의 수도 격인 프리슈티나 등 유고의 주요 도시들이 나토군의 공습을 받았다. 그같은 무력 사용에는 반드시 유엔 안보리의 승인(결의)이 있어야 했다. 그게 규칙 기반 국제질서의 기본적인 작동 원리였다. 

나토는 인류 범죄인 '인종청소의 중단'을 명분으로 내걸었지만, 분명한 정치적 목표도 갖고 있었다. 그때까지 서방측에 의해 '유럽의 마지막 남은 공산주의 독재자'로 불린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제거였다. 서방은 1992년부터 유고에 제재를 가했지만, 밀로셰비치의 권력 체제는 끄떡없었다. 남은 것은 단 하나, 무력행사였다. 

스트라나.ua는 "미국은 소련권에서 갓 벗어난 동유럽 공산권 국가의 지도자들에게 워싱턴의 말을 듣지 않으면 어떤 일이 일어는지, 유고를 통해 보여주고 싶었을지도 모른다"고 분석했다. 그것은 소련 붕괴이후 국제 질서가 미국의 1극 체제로 들어섰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었다.

안타깝게도 나토의 공습에 뒤따른 후폭풍도 거셌다. 무엇보다도 1999년까지 옐친 대통령이 이끄는 러시아는 전반적으로 친서방 노선으로 가고 있었다. 적어도 크렘린의 전략적 방향은 그랬다. 이 흐름을 되돌린 게 나토의 유고 공습이라는 게 스트라나.ua의 결론이다. 공습은 러시아 엘리트층(지도부)에게 '서방은 신뢰할 수 없으며, 워싱턴의 목표는 러시아를 파괴하는 것'이라고 인식하게 만들었다. 나토를 국가 안보를 위협하는 세력으로 받아들이는 국민도 더욱 늘었다. 

러시아가 현실적으로 당장 나설 처지는 아니었다. 1998년 8월 디폴트 선언과 이에 따른 경제 위기로 정치·사회적 혼란은 계속되고 있었다. 옐친 대통령은 나토의 유고 폭격을 비난하고, 이는 주권 국가에 대한 공격 행위이자 국제법 위반이라는 요지의 유엔 결의안을 제출했다. 이 결의안은 통과되지 못했지만, 중국의 지지를 확실하게 얻어냈다. 

나토 공습 25주년을 맞아, 러시아는 이 문제를 다룰 유엔 안보리 개최안을 제출했지만, 프랑스 등에 의해 기각됐다. 러시아 외무부는 26일 국제관례를 무시하고 회의를 무산시킨 프랑스를 비판했다. 이 회의가 유엔 안보리 차원에서 개최되면, 나토의 일방적 유고 공습과 러시아의 특수 군사작전이 크게 다를 바 없음이 공론화할 우려가 컸다. 

◇ 옐친의 선택, 밀로세비치에게 압력 행사

25년 전, 옐친 대통령의 선택은 분쟁 종식을 위한 중재였다. 서방에 맞설 힘도, 유고를 군사적으로 지원할 준비도 되어 있지 않았던 그에게는 다른 길이 없었다. 옐친 대통령은 그해 4월 14일 빅토르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를 유고 담당 대통령 특별 대표로 임명했다. 

하지만 러시아 내부에서는 대서방 강경론이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 푸틴이 옐친 대통령의 후게자로 발탁되지 않았더라도, 당시 후계자로 유력했던 유리 루즈코프 모스크바 시장이나 예브게니 프리마코프 총리가 권력을 잡았더라도, 러시아의 흐름은 바뀌지 않았을 것이라고 스트라나.ua는 분석했다. 

실제로, 러시아와 서방 관계의 전환을 알리는 상징적인 사건은 1999년 3월에 일어났다. 프리마코프 총리가 미국 방문을 위해 대서양을 건너던 중 나토의 폭격 소식에 기수를 돌린 것이다. 

나토의 유고 공습은 거의 매일 무차별적으로 단행됐다. 나토는 8만t 규모의 폭탄을 투하하고, 약 3000기의 순항 미사일을 발사한 것으로 집계됐다. 방사능이 포함된 열화우라늄탄을 사용하기도 했다. 라티슬라프 가스치 세르비아 내무장관은 22일 나토 공습 25주기 기념식에서 "이 작전이 ‘인도적 개입’이라는 이유로 정당화될 수 없다"며 “2,500명에 달하는 민간인과 750명 이상의 군인과 경찰이 사망했고, 국가 기반 시설은 물론, 학교와 의료 시설, 언론사, 기념물, 교회 등이 심각하게 파괴됐다"고 강조했다. 

나토의 공습 중에 비극적인 사건도 수차례나 발생했다. 4월 12일, 미국 F-15E 전투기가 교량을 지나던 열차에 폭탄을 떨어뜨려 20명이 사망했다. 이틀 후(14일)에는 폭격에 가담한 이탈리아 전투기가 유고군의 호위 아래 피란하던 난민 행렬에 폭탄을 투하했고, 22일 밤에는 나토군 전투기가 세르비아 난민 정착촌을 때렸다. 23일에는 베오그라드 방송국이 폭격을 받아 30여명이 사상했다. 부서진 방송국 건물은 나토의 폭력을 웅변하는 기념물로, 아직도 복원되지 않았다. 

5월 7일에는 나토군이 주유고 중국 대사관을 타격했다. 나토는 유고의 정부기관 건물을 겨냥한 것이라고 변명했지만, 이미 그곳은 1993년 중국 대사관으로 바뀐 상태였다. 오폭의 원인은 건물의 주인이 바뀐 줄 몰랐던 옛날 지도였다. 이 오폭 사건이 미국과 중국의 관계를 크게 냉각시킨 것은 잘 알려진 일이다. 

나토 공습/사진출처:rutube.ru

방공망이 부족한 유고는 나토의 무차별적 폭격은 속수무책이었다. 그러나 지상에서는 달랐다. 코소보 군사작전에서는 완전 승기를 잡았다. KLA는 산악 지역이나 인근 알바니아로 도피했고, 나토군의 공습을 계기로 반격을 시도했지만, 번번히 격퇴됐다. 

코소보 해방을 위해서는 나토군의 지상작전이 필요했다. 문제는 지상작전에 뒤따르는 희생이다. 미국과 유럽의 여론도 부정적이었다. 그래서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나토군의 지상 작전을 기다리고 있었다고 한다.

지상 충돌을 막은 것은 역설적이게도 러시아였다. 옐친 대통령은 자신의 회고록 '대통령 마라톤'(Президентский марафон)에서 이렇게 적었다.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는 밀로세비치 대통령과의 협상이 난관에 부딪히자 그에게 대놓고 물었다. '진짜 전쟁에서 이길 수 있다고 생각합니까?'. 밀로세비치는 '아니요, 하지만 우리는 지지 않을 것입니다. 지난 400년 동안 우리를 정복할 수 없었습니다. 지금 한번 하라고 해보세요. 아마 지상작전은 100% 실패할 것'이라고 자신했다".

밀로세비치 대통령의 자신감은 나름의 이유가 있었다. 유고군은 완전히 전투 대비 태세를 갖추고 있었고, 유고 국민들도 자신의 중심으로 똘똘 뭉쳐 있었다. 나토는 섣불리 지상작전에 나서지 못했다. 공습을 계속하는 한편, 옐친 대통령을 압박했다. 

그의 회고록은 자크 시라크 프랑스 대통령과의 일화를 이렇게 소개했다.

"자크 (시라크 대통령)는 막판에 내가 최종 결정해야 한다고 단호하게 말했다. 밀로셰비치를 계속 지지할지 아닐지. 또 러시아에는 두가지 길이 있다고 했다. 지금처럼 계속 국제사회의 가장자리에 머물지, 당신의 지도력 하에 현대적인 세계로 편입할지 선택하라고 압박했다.나는 인간적이고 민주적인 원칙을 확립하는 길을 선택했다."

옐친 대통령은 밀로셰비치 대통령에게 서방의 제안을 받아들이도록 설득겸 압박을 가했다.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의 압박을 받은 밀로세비치 대통령는 대안을 제시했다. 그러나 그것은 서방이 받아들일 수 없는 조건이었다. 나토 군대 대신 러시아, 우크라이나, 인도 및 제3국의 군대를 코소보로 데려오라고 했다. 체르로미르딘 전 총리는 그에게 러시아로부터 군사적 지원을 기대해서는 안된다고, 정치적 지지는 더 이상 없을 것이라고 말했다. 최후통첩이나 마찬가지였다. 밀로세비치 대통령은 마지 못해 서방측 제안에 동의했다."

체르노미르딘 전총리는 또 유고가 항복하는 모양이 되지 않도록 미국 설득에 나섰다. 회고록은 "코소보 사태의 해결을 나토가 아니라 유엔의 손에 넘기기 위해 노력했다.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나토에 항복하는 방식은 체르노미르딘 전 총리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는 미국으로 두번이나 날아가 클린턴 미 대통령과 2시간, 앨 고어 미 부통령과 4시간 협상했다. 밀로세비치 대통령이 수락한 8개 항목은 다소 수정됐지만, 유엔 안보리 결의안으로 만들어졌다"고 썼다. 

유엔 안보리는 6월 10일, 코소보에 평화유지군과 유엔 민간사절단(임시 행정부)을 파견하기로 결정했다. 중국은 유고마저 동의한 이 결의안에 찬성표를 던지지 않았다. 기권했다. 러시아는 찬성했다. 

평화유지군 파견에도 우려 곡절이 뒤따랐다. 파견 직전인 6월 12일 밤, 나토군이 전격적으로 코보소 프리슈티나의 슬라티나 공항을 점령했다. 뒤이어 나토군 본진이 도착했다. 러시아군은 세르비아인 보호를 위해 코소보 세르비아인의 밀집 거주 지역 주둔을 원했으나 거부당했다. 러시아군은 2003년 코소보에서 철수하고 말았다. 

코소보에서 작전하는 평화유지군 소속 러시아군/사진출처:스트라나.ua

코소보는 미국의 지원을 받아 2008년 독립을 선언했다. 그러나 세르비아계와의 분쟁은 계속됐다. 그 사이 세르비아인들은 일부 지역을 제외하고 코소보 전 지역에서 쫓겨났다. '인종 청소를 막는다'며 시작된 나토의 군사작전은 거꾸로 세르비아인의 축출, 일종의 '인종 청소'되는 결과를 낳았다. 코소보의 독립은 세르비아와 러시아, 중국 뿐만 아니라 스페인, 아르헨티나와 같은 여러 국가에서 승인을 받지 못했다. 우크라이나도 코소보를 인정하지 않았다. 코소보는 러시아와 중국의 거부권 행사로 유엔에 가입할 가능성도 전혀 없다. 

스트라나.ua는 나토의 유고 폭격은 우크라이나의 운명에 가장 부정적인 영향을 미쳤다고 본다. 러시아에 급격한 반서방 감정을 불러일으켰고, '강한 러시아'를 표방한 푸틴 대통령의 외교 안보 정책을 결정하는 밑거름으로 작용했다. 15년 후, 푸틴 대통령이 '코소보의 선례'에 따라 2014년 크림반도 합병을 정당화한 게 대표적이다. 

우크라이나나 서방은 러시아의 '코소보 논리'를 궤변으로 몰고 있다. 하지만, '코소보의 선례'가 없었다면? 크렘린은 크림반도 합병의 또다른 이유를 찾아냈을 가능성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유엔 안보리의 승인없이는 무력으로 국경 변경을 시도할 수 없다는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가 1999년 미국(나토)에 의해 파괴되기 시작했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뒤이은 이라크 침공(2003년)은 독일과 프랑스도 지지하지 않았다. 공격의 원인이었던 대량살상무기 보유도 '거짓말'이었다. 러시아를 향해 국제법을 준수하고 '규칙 기반의 세계 질서'를 유지해야 한다는 워싱턴의 주장에 세계의 절반이 매우 회의적이 된 이유다. 코소보 공습과 후세인 이라크 대통령의 운명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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