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럽에서 시베리아까지 여행기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
유럽에서 시베리아까지 여행기 <세상에서 가장 느린 여행>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05.04.17 06:3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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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식 지음, 밀리언하우스 펴냄)은 말 그대로 느린 여행의 기록이다. 지은이는 1996년 초 영국에서 시베리아를 거쳐 한국까지 기차를 타고 여행한다. 시간은 돈이 아니라 시간일 뿐이라고 말하는 지은이는 “이 느리고 긴 여행을 하면서 자신의 여행 방식이 결코 미친 짓이 아니라는 것을, 역사와 인간과 문화를 쓰다듬는 가장 가치 있는 방식이라는 것을” 깨닫는다.

그런데 이 재밌는 기행 속으로 빠져들기 전에, 우선 지은이의 독특한 이력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한국에서 노동운동, 멕시코의 빈민지역 선교사, 이스라엘 키부츠 운영위원, 미국 켄터키 기독교 학교 교목, 폴란드 크렘프나 국립학교 교사…. 언뜻 살펴봐도 이건 뿌리 뽑힌 유목민의 생활이다.

지은이는 자신의 방랑이 “젊음 속에 도사리고 있는 절망이 한순간에 터져나왔기 때문”이라고 토로한다. 그것은 한국에서 노동운동을 할 때부터 서서히 다가온 어떤 벼랑이었다. 따라서 이 여행은 오랜 방랑 끝에 그가 세상을 다시 보듬는 과정이라 볼 수 있다.

여행은 체코의 아름다운 수도 프라하부터 시작된다. 지은이는 프라하에 유령처럼 서성이는 공산주의의 기억과 프라하의 봄을 떠올린다. 소비에트의 실패는 프라하의 민중들을 탱크로 깔아뭉갤 때부터 이미 분명해졌다. 여행의 장면장면마다 역사 의식이 짙게 배어 있는 것은 지은이의 독특한 이력과 무관하지 않다.

체코를 떠나 폴란드에서 강도보다 더 강도 같은 경찰 때문에 한바탕 홍역을 치르고 지은이는 마침내 러시아에 도착한다.

페테르부르크는 피에 젖은 혁명의 도시였다. 1905년 ‘피의 일요일’부터 1917년 10월 혁명까지 도시 곳곳에는 레닌을 위시한 혁명가들의 발자취가 남아 있다. 혁명의 영광은 이내 스러지고 도시는 궁핍 속으로 침몰했다. 발트해의 찬바람이 부는 거리에서 만난 러시아 여인 카티야는 지은이를 자신의 집으로 불러들여 따뜻한 음식과 보드카를 대접하고는 눈물 그렁그렁한 눈으로 그를 배웅하며 이렇게 외친다. “나를 러시아에서 제발 벗어나게 해주세요!”

이 여행의 백미는 시베리아 횡단열차의 기억들이다. 몇 시간을 달려도 온통 눈밭뿐인 시베리아. 그곳은 많은 혁명가들이 학교처럼 한번은 거치고 가는 유배지였다. 지은이는 그곳에서 소비에트의 독재 체제와 한반도의 운명을 교차시켜 떠올리기도 하고 와 보리스 파스테르나크의 사랑을 되새기기도 한다. 열차 안의 각종 인간 군상과 바이칼호의 장대한 풍경은 또 다른 볼거리다.

기차는 러시아를 벗어나 만주를 향해 달린다. 조선족 동포들과 을 부르고 하얼빈 역에서 안중근을 떠올린 것도 잠시, 눈부시게 변화한 베이징의 풍경이 눈에 들어온다.

지은이는 베이징대학에서 톈안먼 사건을 주제로 학생들과 대화를 나눈다. 당시 학부 2학년이었던 한 학생은 톈안먼 사건의 가장 주요한 원동력이 1987년에 분수령을 이룬 한국의 민주화운동이었다고 주장한다. 이렇게 먼 길을 돌아 그가 도착한 곳은 인천항이었다.

길고 느린 여행에서 지은이가 건져낸 것을 한마디로 요약하자면, 아픔과 상처다. 영국부터 인천까지 유라시아 대륙 곳곳에는 사람들의 상처가 배어 있었다. 가장 날카로운 유목민의 눈에만 포착되는 풍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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