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 여대생의 한국 여행기
러시아 여대생의 한국 여행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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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7.29 09: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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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크라시바.”(멋있어요) 태어나 처음 본 한옥의 아름다움에 푹 빠진 러시아 여대생은 할말을 잊었다. 장마가 끝나고 본격적인 무더위가 시작된 지난 19일. 모스크바 국제관계대 한국어학과 2학년에 재학 중인 루다(자카로바 류디밀라·19)와 아나스타샤(보츠가료바 아나스타샤·19)가 전북 전주시 완산구 교동 한옥마을의 ‘양사재(養士齋)’를 찾았다.

양사재는 전주향교의 부속건물로 1875년 지어져 1980년에 개축됐다. 2002년 한옥체험 문화공간으로 새롭게 복원됐다. 전주한옥마을에서도 한옥의 원형을 간직한 몇 안 되는 문화유산이다. 1950년대에는 시조시인 가람 이병기 선생이 머물며 후학을 기른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대문에는 오른쪽과 왼쪽에 용(龍), 호(虎)라 쓰인 종이가 가지런히 붙어 있다. 대문을 열고 들어서자 아담한 마당 가에 핀 채송화가 푸른 눈의 이방인을 맞이한다. ‘ㄱ’ 자 모양의 전통 한옥도 한눈에 쏘옥 들어온다. 소박하면서 단아한 우리 건축물의 아름다운 자태를 한껏 뽐내는 듯하다.

한낮의 무더위가 채 가시지 않은 초저녁. 두 여행객은 지친 탓인지 툇마루에 털썩 걸터앉는다.

“저 작은 방에서 오늘 우리가 자는 건가요?”

난처한 듯한 표정의 루다가 유창한 한국어로 묻는다. 2평짜리 아담한 방에는 베개와 이부자리가 준비되어 있다.

루다는 “제가 잠버릇이 심해 큰 대(大)자로 자서 함께 자는 사람이 불편해하거든요”라고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침대가 없는 곳에서 하룻밤을 지내는 것은 처음이다. 그는 “베개가 너무 딱딱하다”고 말한다. 하지만 단둘이서 경주여행까지 감행했다는 씩씩한 두 여대생. 이내 “재미있는 경험이 되겠네요”라며 웃음 짓는다.

지난 3월 한국외국어대 교환학생으로 한국을 찾은 두 사람은 아무런 도움 없이 경북 경주, 경기 양평 등을 여행했다. 동양에 관심이 많은 루다의 영향인지 이들은 서울 조계사와 봉은사, 경주 불국사를 기억에 남는 여행지로 손꼽았다.

짐을 정리하는 동안 양사재 기와지붕 위로 보름달이 둥실 솟았다. 은은하게 비추는 달빛을 흠뻑 머금은 한옥의 고운 자태가 수줍은 새색시 같다. 두 사람의 눈길이 처마 끝에 머문다. 날렵하게 하늘로 향한 모습이 버선 코를 닮았다. “푸른 지붕이 정말 아름답네요.” 어려서부터 불교에 대한 호기심이 많았다는 루다는 어느새 한옥의 멋에 푹 빠진 듯하다.

양사재 공동대표인 김순석(42)씨는 “전주한옥마을을 방문한다는 것은 단순한 여행의 의미를 넘어 어려웠던 시절을 회상하며 초심으로 돌아가자는 뜻이 있고, 민족정신을 되새기는 과정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루다는 “이곳 사람들은 서울에서 만난 사람들과 달리 서두르지 않고 덤비지 않아 좋다”며 “모두 편안해 보여 보는 나도 기분이 좋았다”고 말했다.

이튿날 아침 한옥에서의 ‘초야(初夜)’에 대해 물었다. 루다는 “허리가 조금 아팠어요”라면서도 “인상 깊은 경험이었다”고 말한다. 그는 “덕수궁 경복궁 불국사 같은 한국의 전통 건축물을 많이 보기는 했지만, 직접 들어가 보고 잠도 잤다는 사실이 신기하다”고 말했다.

아나스타샤도 “100년도 넘은 건물에 묵으니 내가 마치 100년 전 이 건물에 살았던 사람이 된 기분”이라고 말했다.

양사재에서는 한국 전통 다도를 경험할 수 있는 매력이 있다. 후덕한 모습이 인상적인 정재민(39·양사재 공동대표)씨가 다기를 차려놓고 일행을 불렀다. “다기 앞으로 바짝 다가앉아 두 손으로 찻사발을 들어야지요.”

먼저 팽주(烹主·차를 끓여 내놓는 주인 역할)를 맡게 된 루다가 정씨의 지도에 따라 서투르지만 차근차근 다도의 예법을 배워나갔다. 묵향으로 가득했을 선비의 방에는 차향이 은은하다.

“너무 어려워요.” 루다는 연방 엄살을 피우지만 어느새 한옥 방의 안주인이 된 듯하다. 찻잔을 건네받아 코끝에 가져간 아나스타샤는 “향이 참 좋다”고 말한다.

전주한옥마을은 비빔밥, 부채 만들기 등 우리의 전통 멋과 어우러진 체험 프로그램이 다양하다는 게 또 다른 매력이다. 루다와 아나스타샤도 전주공예품전시관을 찾아 무더위를 식혀줄 부채 만들기에 도전했다. 부채에 콤파스를 이용해 태극문양을 그리고 그 위에 빨간색, 파란색 한지를 곱게 찢어 붙이는 작업이다.

두 사람은 40여분 만에 태극무늬가 빛나는 부채 만들기에 성공했다. 아나스타샤는 “한지를 찢어 붙이다 보니 어린 시절로 돌아간 느낌”이라며 만족스러운 표정을 지어보인다.

루다도 “한국에 와서 장구를 쳐본 적은 있지만 뭔가를 만들어본 것은 처음”이라며 뿌듯해했다. 역시 여행의 진미는 보는 것에 그치지 않고 체험하는 것에 있나보다.

도전은 계속됐다. 다음은 전주전통문화센터에서의 비빔밥 만들기 체험. 루다와 아나스타샤는 고영예(34) 팀장의 지도로 오이 당근 호박을 잘게 채 썰고 조물조물 고사리에 양념을 한다. 아무래도 여학생이라서인지 “야무지게 잘한다” “한국사람보다 낫다”는 고 팀장의 칭찬이 계속된다.

아나스타샤가 제일 잘하는 한국음식이 잡채라는 말에 고 팀장은 “잡채는 정말 힘든 것인데…”라며 놀라는 표정이다. 미리 따뜻하게 데운 유기 그릇에 새로 지은 밥을 담고 그 위에 고명을 올렸다. 고명 위에 고추장을 올리고 다시 그 위에는 계란 노른자를 얹는다. 드디어 완성.

시식 시간이지만 둘은 먹는 게 아까운 듯하다. 루다는 “비비지 않고 그냥 먹으면 안 돼요?”라며 비빔밥을 품으로 감싸는 등 어리광을 부린다. 그러다가 못 이기는 척 시식을 허락하면서 묻는다. “우리가 만든 비빔밥, 맛이 어때요?” 매콤달콤한 게 꼭 한국 사람의 손맛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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