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낭을 메고 다가가본 북부 도시 아르항겔스크
배낭을 메고 다가가본 북부 도시 아르항겔스크
  • 이진희
  • jinhlee@hk.co.kr
  • 승인 2013.09.24 06:15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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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시아로 여행을 떠난 분들은 대체로 정해진 코스를 따라가기 마련이다. 특별히 배낭여행을 계획하지 않는다면 정해진 여행 코스외에는 가볼 기회가 없다.

이번 여름에 러시아로 배낭여행을 간 분은 북쪽에 있는 아르한겔스크까지 갔다고 한다. 거기까지 어떻게 갈 수 있을까? 모스크바에서 기차를 타면 된다. 가는데 어려울 것은 없다. 다만 숙식이 문제이고, 뭘 볼 것인가에 대한 질문이 따를 뿐이다.

이분이 간 길을 따라가보자.

이분은 모스크바에서 기차표를 살 때 아르한겔스크를 간다고 했는데, 매표소의 여직원은 세베로빈스크로 끊어줬다고 한다. 러시아어 의사 소통이 잘못된 것으로 보이는데, 사람이 많은 곳에서는 종종 이러한 일이 발생한다. 세베로빈스크는 아르헨겔스크보다 한 정거장을 더 가야 하는 도시다.

그렇다면 세베로빈스크보다 한 정거장 앞에 있는 아르한겔스크이니 내려도 되지 않을까? 안된다고 한다. 아마도 티켓의 발부 원칙이든지, 아님 정확하게 어디에서 어디까지 몇명이 티켓을 끊었는데, 그게 맞는지 여부를 맞춰보기 위한 것인지, 과거 구소련 시절에 이동 거주의 자유를 인정하지 않았을때 주민 통제를 위해 엄격하게 통제한 탓인지 모르겠다.

이분의 글에 따르면,
아르한겔스크 도착을 얼마 안남기고 열차 승무원에게 혹시 아르한겔스크에서 내려도 되는지 묻자 승무원은 단호하게 안 된다고 대답한다. 한 정거장 더 가는 것도 아니고 그 전에 내리겠다는데 안 될 이유가 뭔가?

기차에 내릴 즈음은 저녁 7시가 넘어 하룻밤을 머물고, 이튿날 아르한겔스크로 가야할 것 같은 생각이 들었으나 막장 역광장에 서자 막막해진 심정이었다. 론리 플래닛에 세베로빈스크는 아르한겔스크 옆에 도시이름만 작게 나와 있을 뿐 이 도시에 대한 정보는 아무것도 없었다.

역 광장을 나와 조금 번화한 쪽을 택해 걸음을 옮겼다. 먼지 날리는 오래된 아스팔트길과 키 큰 가로수, 낡은 아파트들과 목조 주택들, 근처에 군사기지가 있는지 군인들을 실은 트럭이 몇 대 흙먼지를 날리며 지나가고 나자 황량함이 더 했다. ‘고스트니짜’라는 호텔을 뜻하는 단어가 쓰여 있는 건물이 있는지 두리번거리며 한참을 걸어갔으나 찾을 수 없었다.

택시기사에게 부탁하여 겨우 찾아간 호텔은 번듯한 외관에 깔끔해 보이기도 했는데 내 여권을 받아본 데스크의 중년의 여직원은 뜻밖에도 외국인을 받을 수 없다고 말했다. 그녀는 아무래도 아르한겔스크로 가는 것이 좋겠다며, 종이쪽지에 아르한겔스크로 가는 버스 번호를 적어 건네주었고, 호텔 앞 버스정류소에서 버스를 탈 수 있다고 친절하게 안내해 준다.

이 호텔 역시 과거 구소련시절과 마찬가지로 들고 나는 사람들을 통제하는 시스템으로 움직이는 것으로 보인다. 특히 외국인의 경우 체류증을 확보해야 하는데, 이 체류증을 확인할 권한을 갖고 있지 않다면 외국인 숙박이 불가능한 것으로 판단된다.

시골 정거장마다 멈춰서는 완행 시외버스는 1시간 정도를 달려 아르한겔스크에 도착했다. 저녁 9시가 넘었으나 백야의 시간대라 아직도 해가 떨어지지 않은 한 낮이라는 느낌이었다.

아르한겔스크에는 가이드북에 소개된 유스호스텔이 하나 있어서 택시를 타고 로모노소프 거리에 있는 로모노소프 유스호스텔로 향했다. 택시는 제대로 찾아왔으나 유스호스텔 정문은 굳게 닫혀있었다.

하는 수없이 좀 비싼 호텔로 갈 수밖에 없어서 다시 택시를 타려고 하는데 시간이 늦어서인지 아무리 기다려도 택시가 오지 않았다. 한참 후 다시 돌아다 본 유스호스텔은 닫혀있던 문이 열려있고 그 앞에 사람들이 몰려있었다. 다시 호스텔 쪽으로 다가갔다. 그들은 여행 온 대학생들로 보였는데, 문만 열려 있을 뿐 안은 컴컴했고 어디가 숙소인지 찾을 수 없었다. 다시 실망스러운 마음으로 돌아 나왔다.

러시아의 유스호스텔 운영 시스템에는 아는 바가 없다. 분명한 것은 백야 시즌때라면 침대 예약이 끝났을 터이고, 그렇다면 예약이 안된 상태에서 숙박은 불가능할 것으로 생각된다.

유스호스텔에서 그다지 오래 걷지 않아서 꽤 큰 호텔에 도착했는데 이름이 아르한겔스크를 흘러가는 강이름을 따서 드비나 호텔이다. 이 호텔 역시 규모는 컸으나 오래되어 낡고, 내부 시설도 보잘 것 없었다. 박비는 2,800루블(약10만원)을 호가한다.

모스크바나 상트페테르부르크 등 일부 도시를 제외하고 다른 지역의 호텔은 아직도 과거 구소련시절의 호텔이라고 보면 틀리지 않다. 규모는 크고, 널찍널찍하지만, 역시 오래된 호텔이라 낡았다. 리모델링을 적어도 10년전에 해야 할 호텔이라고 보면 된다.

호텔에서 멀지않은 길모퉁이의 카페로 들어가서 껍질을 까먹는 피스타치오를 안주로 맥주를 들이켰다. 얼마 안 있어 검정색 비키니 수영복을 입은 까무잡잡한 여자 둘이 나타나더니 창가의 비좁은 무대로 올라가 음악에 맞추어 춤을 추기 시작했다. 손님도 몇 사람 되지 않고 그저 평범한 맥줏집 같은 데 조금은 어설프기도 하고 딴에는 정열적으로 요염하게 춤추는 무희들을 바라보다가 밤 11시가 넘었는데도 대낮같이 밝은 창 너머 길모퉁이에 세워진 전광판에서 낯익은 세모꼴 두 개의 산이 겹쳐있는 현대브랜드가 선명한 광고가 눈에 들어왔다.

전광판에서는 굴삭기와 불도저 같은 중장비 광고가 나왔다 사라지기를 반복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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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진희 2013-09-24 06:19:19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 왕국과의 전쟁 끝에 발트 해의 핀란드만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을 확보한 뒤 네바 강 하구의 늪지대에 세운 도시가 소위 ‘유럽으로 난 창’ 상트뻬쩨르부르그다. 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까지 백해의 아르한겔스크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였다.

서쪽은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독일의 튜튼 기사단, 그리고 스웨덴 왕국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타타르의 일족인 크림한국(汗國)이 건재해 있었으며, 비교적 저항이 약한 동쪽은 이반 4세(뇌제)가 카잔한국을 정복하고, 17세기 초에는 모피 상인들과 카자크 기병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맹렬하게 동진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 영토는 확실하지 않았다.

영국의 모험상인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여름 동양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한 항구를 출발하였다.

북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가다 백해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을 나는 동안 일행의 대부분이 동사했다.

다행히 북 드비나 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월동을 마친 챈슬러는 이듬해 육로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북방항로에는 영국의 함대가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런던에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머스커비 회사’가 설립되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교역을 위한 모스크바 상사를 런던에 개설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러서 1584년 북 드비나 강의 하구에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한겔스크이다.

아르한겔스크는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거점일 뿐만 아니라 군사요새였고, 북극해를 탐험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1693년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조선소를 짓고, 러시아 해군 최초의 배를 진수하였으며, 그 자신이 항해사로 동행하여 북극해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1720년대 표트르의 발틱 함대가 스웨덴의 선단을 물리치고,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상트페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상선들은 발트 해를 통하여 쌍트뻬쩨르부르그로 들어왔고, 아르한겔스크에 있던 무역사무소 또한 옮겨갔다. 교역을 위한 북방항로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아르한겔스크는 주변의 거대한 침엽수림을 기반으로 한 목재산업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있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봉쇄를 피하여 연합군이 물자를 지원하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후의 내전에서는 백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진희 2013-09-24 06:19:19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 왕국과의 전쟁 끝에 발트 해의 핀란드만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을 확보한 뒤 네바 강 하구의 늪지대에 세운 도시가 소위 ‘유럽으로 난 창’ 상트뻬쩨르부르그다. 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까지 백해의 아르한겔스크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였다.

서쪽은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독일의 튜튼 기사단, 그리고 스웨덴 왕국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타타르의 일족인 크림한국(汗國)이 건재해 있었으며, 비교적 저항이 약한 동쪽은 이반 4세(뇌제)가 카잔한국을 정복하고, 17세기 초에는 모피 상인들과 카자크 기병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맹렬하게 동진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 영토는 확실하지 않았다.

영국의 모험상인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여름 동양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한 항구를 출발하였다.

북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가다 백해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을 나는 동안 일행의 대부분이 동사했다.

다행히 북 드비나 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월동을 마친 챈슬러는 이듬해 육로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북방항로에는 영국의 함대가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런던에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머스커비 회사’가 설립되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교역을 위한 모스크바 상사를 런던에 개설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러서 1584년 북 드비나 강의 하구에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한겔스크이다.

아르한겔스크는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거점일 뿐만 아니라 군사요새였고, 북극해를 탐험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1693년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조선소를 짓고, 러시아 해군 최초의 배를 진수하였으며, 그 자신이 항해사로 동행하여 북극해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1720년대 표트르의 발틱 함대가 스웨덴의 선단을 물리치고,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상트페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상선들은 발트 해를 통하여 쌍트뻬쩨르부르그로 들어왔고, 아르한겔스크에 있던 무역사무소 또한 옮겨갔다. 교역을 위한 북방항로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아르한겔스크는 주변의 거대한 침엽수림을 기반으로 한 목재산업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있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봉쇄를 피하여 연합군이 물자를 지원하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후의 내전에서는 백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진희 2013-09-24 06:19:19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 왕국과의 전쟁 끝에 발트 해의 핀란드만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을 확보한 뒤 네바 강 하구의 늪지대에 세운 도시가 소위 ‘유럽으로 난 창’ 상트뻬쩨르부르그다. 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까지 백해의 아르한겔스크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였다.

서쪽은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독일의 튜튼 기사단, 그리고 스웨덴 왕국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타타르의 일족인 크림한국(汗國)이 건재해 있었으며, 비교적 저항이 약한 동쪽은 이반 4세(뇌제)가 카잔한국을 정복하고, 17세기 초에는 모피 상인들과 카자크 기병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맹렬하게 동진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 영토는 확실하지 않았다.

영국의 모험상인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여름 동양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한 항구를 출발하였다.

북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가다 백해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을 나는 동안 일행의 대부분이 동사했다.

다행히 북 드비나 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월동을 마친 챈슬러는 이듬해 육로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북방항로에는 영국의 함대가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런던에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머스커비 회사’가 설립되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교역을 위한 모스크바 상사를 런던에 개설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러서 1584년 북 드비나 강의 하구에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한겔스크이다.

아르한겔스크는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거점일 뿐만 아니라 군사요새였고, 북극해를 탐험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1693년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조선소를 짓고, 러시아 해군 최초의 배를 진수하였으며, 그 자신이 항해사로 동행하여 북극해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1720년대 표트르의 발틱 함대가 스웨덴의 선단을 물리치고,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상트페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상선들은 발트 해를 통하여 쌍트뻬쩨르부르그로 들어왔고, 아르한겔스크에 있던 무역사무소 또한 옮겨갔다. 교역을 위한 북방항로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아르한겔스크는 주변의 거대한 침엽수림을 기반으로 한 목재산업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있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봉쇄를 피하여 연합군이 물자를 지원하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후의 내전에서는 백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진희 2013-09-24 06:19:19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 왕국과의 전쟁 끝에 발트 해의 핀란드만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을 확보한 뒤 네바 강 하구의 늪지대에 세운 도시가 소위 ‘유럽으로 난 창’ 상트뻬쩨르부르그다. 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까지 백해의 아르한겔스크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였다.

서쪽은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독일의 튜튼 기사단, 그리고 스웨덴 왕국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타타르의 일족인 크림한국(汗國)이 건재해 있었으며, 비교적 저항이 약한 동쪽은 이반 4세(뇌제)가 카잔한국을 정복하고, 17세기 초에는 모피 상인들과 카자크 기병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맹렬하게 동진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 영토는 확실하지 않았다.

영국의 모험상인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여름 동양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한 항구를 출발하였다.

북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가다 백해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을 나는 동안 일행의 대부분이 동사했다.

다행히 북 드비나 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월동을 마친 챈슬러는 이듬해 육로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북방항로에는 영국의 함대가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런던에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머스커비 회사’가 설립되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교역을 위한 모스크바 상사를 런던에 개설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러서 1584년 북 드비나 강의 하구에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한겔스크이다.

아르한겔스크는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거점일 뿐만 아니라 군사요새였고, 북극해를 탐험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1693년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조선소를 짓고, 러시아 해군 최초의 배를 진수하였으며, 그 자신이 항해사로 동행하여 북극해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1720년대 표트르의 발틱 함대가 스웨덴의 선단을 물리치고,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상트페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상선들은 발트 해를 통하여 쌍트뻬쩨르부르그로 들어왔고, 아르한겔스크에 있던 무역사무소 또한 옮겨갔다. 교역을 위한 북방항로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아르한겔스크는 주변의 거대한 침엽수림을 기반으로 한 목재산업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있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봉쇄를 피하여 연합군이 물자를 지원하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후의 내전에서는 백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

이진희 2013-09-24 06:19:19
1703년 표트르 대제가 발트 해를 장악하고 있던 스웨덴 왕국과의 전쟁 끝에 발트 해의 핀란드만으로 나갈 수 있는 땅을 확보한 뒤 네바 강 하구의 늪지대에 세운 도시가 소위 ‘유럽으로 난 창’ 상트뻬쩨르부르그다. 이 상트페테르부르크를 건설하기 전까지 백해의 아르한겔스크는 러시아의 유일한 항구였다.

서쪽은 강력한 폴란드-리투아니아 연합왕국, 독일의 튜튼 기사단, 그리고 스웨덴 왕국이 버티고 있었고, 남쪽으로는 타타르의 일족인 크림한국(汗國)이 건재해 있었으며, 비교적 저항이 약한 동쪽은 이반 4세(뇌제)가 카잔한국을 정복하고, 17세기 초에는 모피 상인들과 카자크 기병들이 우랄산맥을 넘어 맹렬하게 동진하고 있었으나 아직 그 영토는 확실하지 않았다.

영국의 모험상인 리처드 챈슬러는 1553년 여름 동양으로 가는 북방항로를 개척하기 위해 잉글랜드의 한 항구를 출발하였다.

북동쪽으로 스칸디나비아 반도의 노르웨이 해안을 따라가다 백해에 이르러 더 이상 나아갈 수 없게 되었고, 겨울을 나는 동안 일행의 대부분이 동사했다.

다행히 북 드비나 강이 백해로 흘러드는 하구에서 월동을 마친 챈슬러는 이듬해 육로로 모스크바에 도달할 수 있었다. 이후 이 북방항로에는 영국의 함대가 출몰하기 시작했으며, 런던에는 러시아와 무역하는 ‘머스커비 회사’가 설립되었고, 러시아 또한 영국과 교역을 위한 모스크바 상사를 런던에 개설했다.

그리고 30여년이 흘러서 1584년 북 드비나 강의 하구에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도시가 건설되었는데 이것이 바로 아르한겔스크이다.

아르한겔스크는 영국과의 교역을 위한 거점일 뿐만 아니라 군사요새였고, 북극해를 탐험하기 위한 전진기지로서도 그 중요성이 인정되었다.

1693년 표트르 대제는 이곳에 조선소를 짓고, 러시아 해군 최초의 배를 진수하였으며, 그 자신이 항해사로 동행하여 북극해 탐험에 나서기도 했다.

1720년대 표트르의 발틱 함대가 스웨덴의 선단을 물리치고, 북방전쟁에서 승리하고 난 뒤 상트페쩨르부르그는 러시아 최대의 항구도시이며, 무역의 중심지가 되었다. 영국의 상선들은 발트 해를 통하여 쌍트뻬쩨르부르그로 들어왔고, 아르한겔스크에 있던 무역사무소 또한 옮겨갔다. 교역을 위한 북방항로는 이제 그 중요성을 잃게 되었다.

아르한겔스크는 주변의 거대한 침엽수림을 기반으로 한 목재산업의 중심지로 그 위상이 바뀌었다. 20세기에 있은 두 번의 세계대전에서는 독일군의 봉쇄를 피하여 연합군이 물자를 지원하는 중요한 병참기지가 되었으며, 볼셰비키 혁명이후의 내전에서는 백군의 근거지 중의 하나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