블라디의 한국인 농장-아그로 상생 농장 르포 한국일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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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11.10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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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첫눈이 내렸다. 창문을 여니 바다처럼 펼쳐진 연해주의 눈 덮인 들판을 힘껏 달려온 칼바람이 코를 사정없이 후빈다.

러시아 연해주 야누친스크 군(郡) 그라즈단카 마을에 대순진리회가 운영하는 ‘아그로 상생’ 젬추쥐느 농장. 블라디보스톡에서 북쪽으로 250km 정도 떨어진 이 농장은 벌써 한겨울 풍경으로 접어들었지만, 추수를 마친 뒤의 여유와 풍요로움이 넘쳤다.

‘아그로 상생’은 영농(Agriculture)의 러시아식 발음 ‘아그로’에, 대순진리회의 종지(宗旨)인 해원상생(解寃相生ㆍ원통한 마음을 풀고, 조화를 이룸)의 상생을 붙였다.

국내종교단체의 해외진출 농장 1호인 이곳의 올해 수확량은 벼 1,175톤, 콩 1,000톤, 귀리 725톤, 밀 137톤. 창고마다 산더미처럼 쌓아놓은 농작물의 출하준비를 하느라 하루 해가 짧다.

대순진리회가 러시아 정부와 50년간 임대계약을 맺어 운영하고 있는 ‘아그로 상생’농장은 연해주에만 젬추쥐느를 비롯해 코르닐로프카, 루비노브카, 멜구노프카, 일린카, 아방가르드 등 모두 6곳으로 전체 면적은 5만3,000 헥타르. 서울시 면적에 육박하는 규모이며 충북 경지면적의 절반에 달한다.

올해 전체생산량은 9,800톤이고 총 매출액은 28억원에 이른다는 게 농장관계자의 설명이다.

이번 수확은 여러 모로 뜻이 깊다. 무엇보다 발해인들의 터전이요, 독립운동가들이 울분을 삼키며 일제와 싸우던 본거지이면서 고려인들의 피와 땀, 눈물이 배어있는 땅에 성공적으로 정착했다는 점이다.

그동안 국영 집단농장(콜호즈)로 운영되던 이 지역은 1990년대부터 중국의 저가 농산물이 유입되면서 농작물생산량이 급격히 감소했고, 거의 버려진 땅으로 남아있었다. 국내기업들이 여러차례 진출했지만 현지사정에 대한 이해가 부족하고 위탁영농식으로 운영해 실패했다.

하지만 ‘아그로 상생’이 콤바인(34대), 트랙터(106대), 트럭(18대) 등 영농장비 구입자금 등 지금까지 110억원 가까이 투입하면서 분위기는 크게 달라졌다.

주정부 관계자들과 현지인들은 종단관계자들을 지역경제를 살려낸 구세주로 여기고 있다. 그라즈단카 마을 읍장인 니콜라이 푸센코는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주민들이 떠났다가 지금은 300호 가까이 늘어났다”며 연신 감사의 고개를 숙였다.

특히 이 지역 고려인들은 모두 “꿈 같은 일이 일어났다”며 눈물을 글썽였다. 야누친스키군 고려인협회 대표 김용주(76)씨는 “그동안 많은 고려인들이 설움과 고통을 겪었으나, 이제는 당당히 살게 됐다”고 말했다.

루비노프카 농장의 책임자인 고려인 양 알렉산드로 일리야(55)씨는 “카자흐스탄이 독립한 후 연해주로 옮겨와 대순농장의 도움으로 농사를 짓고 러시아 시민권까지 얻게 됐다”면서 “죽어도 여한이 없다”며 감격스러워 했다.

또 “1937년 고려인 이주정책에 따라 모스크바로 옮겨가 살고 있다”는 이아원(82)씨도 최근 농장을 방문, “주변 고려인 10여 가족과 함께 내년부터 이 농장에서 일하기로 결정했다”고 말했다.

종단측은 생산물의 판로에는 전혀 문제가 없다면서 앞으로 “4개 농장을 더 인수하여 아예 이 일대를 한민족들의 공동생활터전으로 만들겠다”고 밝혔다. 종단 관계자는 “중앙아시아에 있는 고려인 뿐 아니라 중국의 조선족, 북한의 영농일꾼, 국내 농가까지 끌어들여 상생할 수 있는 공간을 갖추는 게 최종 목표”라면서 “2006년 정도에는 자립할 수 있는 여건을 마련할 것”이라고 말했다.

블라디보스톡=글 사진 최진환기자 choi@hk.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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