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5년 피의 일요일 혁명의 함성을 느끼며-칼럼
1905년 피의 일요일 혁명의 함성을 느끼며-칼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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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5.01.24 08: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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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차 러시아혁명 100주년

1962년 존 F. 케네디 대통령은 “평화적인 혁명을 수행할 수 없는 사람들은 폭력적인 혁명을 불가피하게 만든다”고 말했다. 내가 이 중요한 말을 다시 생각하게 된 것은 올해가 1905년 1월22일 ‘피의 일요일’로 알려진 제1차 러시아혁명 100주년이라는 사실을 기억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이 사태는 교회사(敎誨師)였던 가퐁 신부로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차르 니콜라스 2세에게 정치범 사면을 포함한 정치적 자유와 하루 14∼15시간의 노동시간을 8시간으로 단축해 달라고 호소하는 청원서 제출 운동을 이끌었다. 생계비 폭등에 직면한 청원자들은 누진적인 소득세를 포함한 세제개혁을 촉구했다.

가퐁 신부는 보통 신부가 아니었다. 영국 역사가 로버트 서비스에 따르면 가퐁 신부는 1905∼06년 니콜라이 레닌을 매혹시켰고 그와 장시간 대화를 나눴다. 레닌은 가퐁 신부가 러시아 노동자들을 직관적으로 이해하는 능력을 지니고 있다는 것을 인식했다.

‘피의 일요일’ 사건은 포트 아서(뤼순항)의 함락으로 고비에 이른 노일전쟁에서 러시아 육군과 해군이 참패한 후 일어났다. 가퐁 신부가 이끄는 청원자들은 즉각적인 전쟁 중지를 요구했다. 그들은 차르와 러시아 정교회 성자들의 사진을 들고 차르의 겨울별궁 광장에 운집했다.

그때 궁정 수비대가 경고도 없이 시위자들에게 발포를 해 100명의 사망자와 수백명의 부상자를 냈다. 이 학살은 러시아 전역에서 폭동을 불러 일으켰다. 그러나 당시의 폭동은 비조직적이었고 궁극적인 목표에 대해 아무런 공감대를 가지고 있지 않았다.

한때는 300만 노동자들이 파업을 벌였다. 심지어 한층 더 이례적인 일은 전국적인 농민동맹의 조직이었다. 바로 이때 ‘소비에트’라는 어휘가 처음 사용되기 시작했는데 당시 그것은 단지 ‘협의회’라는 의미밖에 없는 무해한 단어였다.

그러나 이러한 사태는 레닌과 같은 혁명적 천재에게는 중요한 기회였고 그는 이를 모두 혁명적 전략에 반영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라는 그의 저서는 1902년에 출간되었다. 그는 1905년 피의 일요일이 별다른 성과를 거두지 못할 것이라는 점을 인식했다.

차르 체제는 약간의 피를 흘렸지만 큰 상처를 받지 않고 위기를 넘겼다. 몇 가지의 미봉적인 개혁이 이루어졌으나 그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레닌은 진정한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부르주아 혁명 다음에야 가능하다는 칼 마르크스의 ‘법칙’을 무시했다. 그는 1905년 사태에서 교훈을 체득했는데 그 중에서 가장 중요한 교훈은 혁명을 하려면 통제할 수 있는 일단의 헌신적인 혁명가들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1905년 사건은 1917년에 일어난 볼셰비키 혁명의 예행연습으로 묘사된다.
지금부터 100년 후인 2105년에 오늘날을 되돌아볼 때 우리는 지금 100년 전의 1905년을 되돌아보는 것과 마찬가지로 세계가 섬뜩하게 보이지 않을까 염려된다. 지난 100년간 세계는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여섯 차례의 작은 전쟁, 수소폭탄의 시대, 그리고 2001년의 9·11 테러사태를 겪었다.

아널드 베이크먼 (美 후버연구소 연구원),세계일보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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