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리키 문학대학 수학 이나미씨, 모스크바 배경 소설집 내놓아
고리키 문학대학 수학 이나미씨, 모스크바 배경 소설집 내놓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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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04.07.05 09: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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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음꽃은 제아무리 아름다워도 조만간 스러질 운명이다. 그러나 대기의 기온이 낮으면 낮을수록, 세상이 혹한으로 얼어붙으면 붙을수록 차가운 얼음꽃은 투명하고 단단해진다.

얼음꽃의 존재 조건은 혹한이요 고통이다. 고통이 클수록 생명력은 더 강인해진다. 세상이 훈훈해지면 그제야 얼음꽃은 조용히 죽음을 맞지만 그 존재의 기억은 투명하고 명징하다.

그 얼음꽃,‘빙화(氷花)’는 삶의 혹한지대를 헤쳐 나가는 이들의 고통과 죽음을 애잔한 시선으로 그려낸 이나미(43)의 두 번째 소설집이다.

표제작은 모스크바에 유학온 한국 여학생이 기숙사 화재로 엘리베이터 안에서 숯이 되어버린 참담한 이야기다. 그 죽은 여학생에게 러시아는 비록 혼돈스럽고 불친절이 판치는 사회 정황임에도 “도도하면서도 고난의 길을 마다하지 않고 광기처럼 내재한 슬라브적 영혼을 주체 못해 갈망에 몸을 떠는 우수 어린 영혼들의 조국”이었고, 갈수록 정이 붙는 나라였다. 공부가 다 끝나고도 그 정 때문에 더 머무르다가 그 정으로 인해 죽어버린 셈이다.

화자는 ‘정들이는 것처럼 허망한 일은 없다’고 되뇌인다. 그러나 어차피 인생에서 피할 수 없는 두 가지 행사가 ‘이별과 출발’이라면 그녀는 그 두 가지를 동시에 해치운 것이라고 화자는 자위한다. 그녀는 “아름다우면서도 우수와 비애, 위선투성이인 세상과 이별했고, 행복의 대가치곤 항상 큰 상처를 요구하는 사랑도 놓아버렸고, 평생 자신의 이성과 의식의 그릇이었던 몸과도 작별한 뒤 영원을 향한 기나긴 여로에 올랐다”고 생각한다.

‘봉인’에서도 두 사람의 죽음이 등장한다. 한 남자는 바로 옆집에서 고혈압으로 쓰러져 죽었고, 그 남자의 죽음을 목격하면서 모스크바 시절 심장마비로 호수 밑바닥으로 가라앉아버린 또 다른 남자를 떠올린다. 두 죽음 앞에서 화자는 “삶의 소임은 죽음을 기르는 것이고 맥박은 제 무덤을 파는 삽질 소리”라는 누군가의 말을 연상한다. 이나미가 펼쳐내는 죽음은 부친의 죽음과 장례 과정이 세필로 묘사된 ‘그림자 놀이’에서 정점에 이른다.

이나미의 소설 속에서는 죽음 반대편에 놓인 삶도 회색빛이긴 마찬가지다.

앙코르와트를 여행하며 헤어진 연인을 생각하는 단편 ‘자리’에서 이나미는 살아 있다고 해서 반드시 죽음과 무관한 밝은 활력을 누리는 것이 아님을 역설한다. “시간은 모든 것을 파괴한다. 그러나 내 안에 흐르는 시간은 아무것도 파괴하지 못했다. 오히려 더욱 생생하게 복원시켜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홀로 고군분투했다.”

급기야 그녀는 “만일 정말 윤회가 있어 환생이 가능하다면 나는 다신 인간으로 태어나고 싶지” 않고, “물가에 피어 있는 다년생 화초나 한 마리 새로 몸을 바꾸어 나고” 싶은 아득한 절망에 빠져든다.

1988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문단에 나온 뒤 1990년대 러시아 고리키문학대학에서 수학했던 이나미씨. 그는 첫 번째 소설집에 이어 이번 창작집에서도 러시아를 배경으로 삼은 작품들을 중심으로 생의 우울과 죽음을 깊이 천착하고 있다.

그러나 이제 그녀가 느리지만 조금씩 우울의 깊은 우물 속에서 생의 빛 속으로 진입하고 있음이 감지되기도 한다. 소설집 말미에 수록된 ‘적요’에서 그녀는 드디어 세상을 향해 힘껏 고함을 친다. “온통 다 병들었어. …다 중증환자들이야!” 그러자, 딱딱한 얼음꽃에서 이파리 하나가 흔들리기 시작한다. 세계사 8500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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