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가 러시아에 미쳤다. 1990년에 생긴 우연한 일이 그의 인생을 바꿔 놓은 것. "콤소몰(공산청년동맹)의 초청으로 러시아(소련)를 가게 됐어요. 별다른 준비 없이 다녀온 첫 해외여행이었지만 충격으로 다가왔어요. 그때만 해도 러시아는 달나라처럼 먼 곳이었거든요."
그는 어쩔 수 없이 무역학과 교수가 됐지만, 또 다른 삶을 러시아에서 찾았다. 러시아와 관련된 자료를 모으기 시작했고, 1997년 시베리아 횡단열차도 탔다.
그에게 가장 큰 충격을 준 것은 러시아의 '다차' 문화. 여름만 되면 썰물처럼 모스크바 사람들이 도시 외곽의 다차로 빠져나갔고, 그 문화를 화두로 잡고 98년과 99년 미국 인디애나 대학의 러시아 동유럽 연구소에서 연구년을 보냈다고 했다.
그러던 중 트레치야코프 미술관을 발견했다. 오랫동안 보수공사를 끝내고 다시 개장할 즈음이다. 이 미술관은 19세기 러시아 리얼리즘 회화의 80~90%를 소장하고 있다. 남들이 붉은광장을 기웃거릴 때 그는 트레치야코프 갤러리에서 2~3일을 보냈다. 7번의 러시아 여행에서 빠뜨리지 않았던 코스다.
이곳에서 그는 일리야 레핀이란 걸출한 러시아 화가를 발견했고, 그의 그림만으로도 19세기 러시아의 역사를 설명할 수 있겠다 싶은 생각이 들었단다. 일리야 레핀의 화보를 사 모으고, 그를 주인공으로 한 책을 쓸 작정도 했다. 모스크바와 상트페테르부르크를 비교한 '러시아판 나의 문화유산답사기'도 쓸 요량이었다.
배낭을 메고 하염없이 걸으면서 사진을 찍었다. 하지만 학교에서 학장이란 직책을 맡고, 뜻하지 않는 곳에 발을 담그면서 그의 러시아 프로젝트는 지난 2008년 '모스크바에서 쓴 러시아, 러시아인'이란 입문서로 낸 것으로 일단 만족해야 했다.
지금은 고은사진미술관 운영에 깊숙이 빠져 있다. 그는 어린 시절 가졌던 인문학과 예술에 대한 갈증을 러시아에서 푼 뒤 다시 고은사진미술관으로 옮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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