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에도 '러시아 정교회 시대'가 다시 열렸다는데..역사를 보니.
한국에도 '러시아 정교회 시대'가 다시 열렸다는데..역사를 보니.
  • 이진희 기자
  • jhnews@naver.com
  • 승인 2019.01.12 09:5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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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에도 '러시아 정교회' 시대가 다시 열렸다. 한국에서 러시아 정교회의 선교 활동이 중단된 지 70년 만이다. 러시아 정교회 시노드 회의(주교 회의)가 지난해 12월 28일 남북한의 정교도 신도들을 관리하기 위해 총대주교 대리구를 신설했다. 러시아인 신부도 한국 땅을 밟았다.

고려대 사학과의 바실리 V 레베데프(석사)는 언론 기고를 통해 이같은 사실을 밝혔다. 그는 "분단 후 거의 70년 만에 재개된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 선교 역사"에 대해 자세히 설명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정교회의 독립을 계기로 세계정교회(콘스탄티노플 정교회)와 러시아 정교회가 분열 위기에 직면해 한국 정교회가 이 땅에 제대로 뿌리를 내릴지 궁금하다.

지난해 8월 세계정교회의 두 거두가 만난 모습. 왼쪽이 키릴 러시아 정교회 총대주교.

 

특히 한국 정교회는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노플 정교회의 관할로 옮겨져 오늘날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다시 러시아 정교회 산하로 들어간다면, 양 세력의 대립과 반목이 불가피하다. 

레베데프의 기고에 따르면 러시아 정교회의 한국선교회는 1897년 고종이 아관파천을 끝내고 대한제국 선포를 준비하던 무렵, 러시아 제국 외교사절단 부영사 대행의 성직자 파송 요청에 따라 공식적으로 창설되었다.

그 선교 활동은 1900년 2월 대수도사제가 한성(서울)에 도착한 후에야 비로소 시작되었다. 선교회는 한국인들을 대상으로 러시아어, 기독교 교리 등을 가르쳤는데, 그중 한국인 14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러나 정교회 선교는 불과 몇년만에 중단됐다. 러일 전쟁에 승리한 일본측이 러시아 선교사들을 추방하고 선교회 활동을 중단시켰기 때문이다. 첫 정교회 성당인 '니콜라이 성당'은 1903년 선교회 부속학교에서 문을 열었지만, 같은 이유로 1년만에 문을 닫았다. 

그러나 3년 뒤인 1906년 한국 선교 활동은 재개됐고, 1906~1912년 성찬예배가 한국어로 완역됐으며 모두 322명이 세례를 받았다. 그중 최초의 조선인 정교회 성직그러나자도 생겼다.

1917년 10월 러시아 혁명 이후 러시아 정교회는 재정난으로 한국 관할권을 1923년 도쿄 대주교 세르기 티호미로프에게 이양했다. 재산도 일본 정교회 재단 명의로 이전했다. 조선선교회는 일제강점 시기에는 러시아인 일본대주교의 관할아래서 발전했다. 1935년 조선인 정교도 신도는 약 1100명에 달했다.

그러나 조선선교회는 각국의 '정치 권력'에 의해 이리저리 쫓겨다녀야 했다.

패망 위기에 몰린 일본 당국에 의해 조선선교회의 전권은 1941년 10월 조선에 있던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1936년 조선선교회 관리자로 임명)에게 넘어갔으나, 해방을 전후해 러시아 정교회의 동아시아 총대주교대리구에 편입되었다가 1945년 12월 27일부터 다시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의 관리하에 ‘임시자치’가 공인되었다.

그러나 남북분단을 즈음해 반소련파 러시아인들과 일부 한국인 정교회 신도가 1947년 미소공동위원회 소련 대표단이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를 방문했다는 이유로 그를 쫓아내고 선교회의 소속을 바꾸기로 했다. 그들은 주일본 연합군 최고사령부의 관할하에 있던 일본 정교회 산하로 들어갔다. 

폴리카르프 프리마크 대수도사는 대한민국 정부 수립 직후 경찰에 체포돼 1949년 6월 말 추방됐다. 한국선교회는 한국전쟁으로 성당이 파손되는 등 큰 피해를 입었으나, 한국전쟁에 참전한 그리스 군인들에 의해 복구됐고, 1955년 12월 25일 일본 정교회 산하에서 다시 콘스탄티누폴리스 정교회의 관할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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