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루만에 끝난 프리고진 '바그너 그룹'의 군사 반란 - 도대체 왜? 그런 일이..
하루만에 끝난 프리고진 '바그너 그룹'의 군사 반란 - 도대체 왜? 그런 일이..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6.26 05: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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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이, 말도 안되지,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
도대체 앞뒤가 안맞는, 조잡하고 비현실적인 영화를 보는 것 같았다. 어처구니 없는 일이 말도 안되게 끝난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이었다.

러시아의 모든 학부모들이 기다리는 '쉬콜라'(초중등 교육과정의 통합학제, 우리 식으로는 초·중·고) 졸업식이 예정된 24일, 러시아 용병업체 '바그너 그룹'이 군사반란을 일으켰다. 푸틴 대통령에게 충성을 다하던 최측근 올리가르히 예브게니 프리고진이 총구를 거꾸로 돌릴 줄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주인(푸틴)에게 팽(烹)당한(즉, 토사구팽·兎死狗烹)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이 분을 참지 못했으리라는 예상은 되지만, 군사반란을 꿈꿀 줄은 상상조차 못했다.

로스토프나도누의 군사령부를 장악한 프리고진/텔레그램 영상 캡처

푸틴 대통령이 즉각 '반역'으로 규정하고 대테러 작전에 나선 것은 당연했다. 그러나 우크라이나 전선에 주력군을 배치해둔 상황에서 내부에서 일어난 군사 쿠데타를 진압할 수 있는 뽀족한 방안은 별로 없었다. 무리하게 진압에 나서기보다는 주둔한 남부 로스토프(州)의 주도 '로스토프나도누'를 벗어나지 못하도록 차단하고, 수하 병력들을 설득해 스스로 무기를 버리도록 하는 작전을 쓸 것으로 예상됐다. 푸틴 대통령의 긴급 연설도 그쪽으로 맞춰졌다. 또 우크라이나 전선에서 대기중이던 '체첸 전사'(체첸자치공화국 자원병력)들이 '로스토프나도누' 외곽에 진주했다.

하지만, '바그너 그룹'은 더 민첩하게 움직였다. 로스토프나도누에 진주한 뒤 곧바로 모스크바로 향하는 'M-4 고속도로'를 타고 북진하면서 보로네즈를 거쳐 리페츠크까지 진격했다. '바그러 그룹'의 부대 이동을 막을 수 있는 부대나 병력은 없었다. 모스크바 외곽 지역으로 진입해야 비로소 소위 '수도경비사령부'가 나설 수 있는 상황이었다. 프리고진이 철수 명령을 내리면서 "지금까지 피 한방울 흘리지 않았다. 이제부터 피를 흘리게 될 것"이라고 한 것도 수도경비사령부와 접전을 예상한 것으로 분석됐다. 

'바그너 그룹'이 로스토프나도누(맨 아래)에서 M-4 고속도로를 타고 모스크바로 북진한 경로. 아래부터 색깔별로 로스토프주, 보로네즈주, 리페츠크주다. 리페츠크에서 회군했다. 
대테러 작전이 발령된 모스크바 풍경들. 장갑차량이 교통을 통제하고, 검문검색이 실시됐으며, 크렘린이 있는 붉은 광장은 출입이 금지됐다.
'바그너 군대'의 진격을 막기 위해 M-4 고속도로를 부분 부분 파헤쳐 장애물로 만들고 있다/텔레그램 영상 캡처

모스크바에서 200㎞ 떨어진 리페츠크까지 진격하는 동안, '프리고진 반란군'을 막아선 방위군이 하나도 없었다는 건 놀랄 만하다. '어떻게 저럴 수가 있어?'였다.

더 웃기는 것은, 한 순간에 진격을 중단하고 철수하기로 한 프리고진의 결정이었다. '장난하는 거야?'라는 질문이 절로 나왔다. 모스크바를 잡아먹을 듯이 서슬 퍼렇게 진격해오던 프리고진도, 반란군으로 규정하고 가혹하게 대응할 것이라는 푸틴 대통령의 엄포도 모두 '없던 일'이 됐다. 

'바그너 그룹'의 군사반란은 그렇게 하루만에 끝났다. "이게 말이 돼?" 

지지부진한 반격 작전에 고심하던 우크라이나는 프리고진의 군사 반란 소식에 만세를 불렀다. 32년 전인 1991년 8월 '소련 공산당 강경 세력의 쿠데타'로 고르바초프 체제(소련)가 무너지듯이 '푸틴 체제'가 허물어지고, 전쟁도 자신들의 승리로 끝날 것이라는 기대가 폭발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는 24일 프리고진의 철수 명령이 나오기 전에 "러시아에서는 100여 년 만에 유례가 없는 사건이 진행 중"이라며 "군사 봉기가 시작됐다"고 선언했다. "이는 푸틴 (대통령의) 통치 기간에 처음으로, 러시아의 국가 체제 자체를 위협하고, 우크라이나 전쟁에 직접적인 영향을 미칠 수 있다"고 흥분하기도 했다. 

우크라이나는 106년 전 '제정러시아의 차르(황제) 체제'를 무너뜨린 1917년 2월 혁명의 재연을 기대했다는 뜻이다. 민란(농민과 노동자 반란)의 진압을 명령받은 '차르 군대'가 민심을 거역하지 못하고 총구를 거꾸로 돌리면서 제정 러시아의 '2월 혁명'은 '차르 시대'를 끝내고 소위 '공화정 시대'를 열었다. 

푸틴 대통령도 24일 긴급 대국민연설에서 “1917년에도 러시아에 그런(등에 칼을 꽂는) 공격이 가해졌다”고 100여년 전 역사를 소환했다. 우크라이나 측과는 다른 의도였다. 

로스토프나도누에 진주한 '바그너 군대'(위)와 시민들과 대화하는 장면/텔레그램 영상 캡처 

100여년 전과 결정적으로 다른 점은 민심이었다. '2월 혁명'의 성공 뒤에는 제1차 세계대전으로 피폐해진 국민의 삶과 분노가 있었다. 우크라이나에서 특수 군사작전을 벌이고 있는 지금과는 판이하게 달랐다. 코로나 팬데믹(대유행)과 전쟁으로 물가가 오르자, 러시아 정부도 지속적인 최저임금 인상으로 국민 불만을 달래고 있는 중이다.

1991년 8월 쿠데타에서도 민심이 대세를 갈랐다. 모스크바로 진주하는 소련군 탱크를 시민들이 막아섰다. 당시 옐친 (소련의) 러시아 공화국 대통령이 탱크 위로 올라가는 등 시민의 위대한 힘을 과시하자, 소련군은 물러났고, 공산당 쿠데타는 실패하고 소련은 붕괴의 길로 들어섰다.

옐친 대통령 박물관에서 상영되는 동영상의 한 장면. 옐친 대통령이 소련군 탱크를 막아서는 모습이다/바이러 자료 사진(김원일 제공) 

'2월 혁명'과 1991년 쿠데타가 각각 '차르 체제'와 '소련공산당 체제'를 유지하기 위한 몸부림이었다면, 프리고진의 군사반란은 견고한(?) 푸틴 체제에 대한 도전이었다. 민심 이반의 조침도 보이지 않았다. 

스트라나.ua는 25일 프리고진의 반란이 실패한 주된 이유로 국민 전 계층의 지지 부족을 꼽았다. 국민은 그의 반란을 이해하지 못했고 지지하지도 않았다고 했다. '바그너 군대'가 로스토프나도누에 진주하자, 시민들은 "도대체 왜 (우크라이나 전선도 아니고) 여기서 난리를 치느냐"고 항의했다. 또 '바그너 군대'가 철수할 때 시민들이 박수를 쳐준 이유는 그들이 피를 흘리지 않고 스스로 떠난다는데 대한 환영이라고 스트라나.ua는 해석했다. 그렇다면 프리고진은 계란을 들고 바위를 치는 격이 아니었을까? 

'바그너 그룹'은 러시아 남부 지방을 뒤흔든 뒤 아무 일이 없었다는 듯이 물러났다. 그러나 1991년 쿠데타가 '고르바초프 체제'를 흔들었듯이, 푸틴 체제도 이번 사건으로 큰 타격을 입었다. 무려 23년간 이어온 권력이 최대 위기를 맞았다.

30년 전과 다른 점은 푸틴 대통령에게 맞설 '제 2의 옐친'과 같은 인물이 없다는 것이다. 고르바초프의 인기를 능가하는 옐친의 존재가 30년 전에는 판을 바꾸는 데 결정적이었지만, 지금은 푸틴을 대체할 유력한 인물이 찾아보기 어렵다. 

스트라나.ua의 결론이 더 흥미롭다. '1917년은 왜 반복되지 않았는가?'라는 제하의 기사에서 이번 사태의 핵심을 다음 6가지로 정리했다. 

1)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이 전날 발표한 합의 내용과 프리고진이 이를 반박하지 않았다는 점에서 러시아 당국은 반란 진압에 성공했다. '1917년 2월'은 다시 일어나지 않았고, 프리고진이 벨로루시로 떠나면, 특수 군사작전 와중에 (크렘린의 지지를 받는/편집자) '바그너 그룹'의 존재로 혼란을 겪었던 러시아군의 '이중 지휘 체계'는 끝나게 된다. 

2) 군사 반란이 단시간에 진압되면서 러시아의 내부 안정도는 크게 높아졌다. 프리고진이 러시아군의 일사분란한 지휘 체제를 계속 흔들어주기를 희망해온 키예프(키이우)와 서방의 기대는 이제 사라졌다. 

3) 러시아 당국(푸틴 체제)은 권위에 큰 타격을 입었다. 용병들의 반란을 허용했고, 그들은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모스크바로 향했다. 협상을 통해 가까스로 해결됐다. 푸틴 대통령의 약점이 노출됐다. 그러나 어떤 면에서는 이번에 '예방 접종'을 받았다고도 할 수 있다. 

4) 반란의 실패는 군대와 여론 주도층(엘리트), 사회로부터 지지를 받지 못했기 때문이다. 수많은 종군기자와 인플루언스(텔레그램 채널)들이 그동안 프리고진의 편을 들었지만, 그것은 현실과는 거리가 멀었다. 사람들은 반란을 이해하지도 못했고 지지하지도 않았다. 프리고진이 국민의 지지를 받으려면 경제 상황의 급격한 악화나 전쟁에서의 심각한 패배인데, 그런 것들은 아예 없었다. 시민들은 '바그너 군대'의 진주에 대해 "도대체 왜 (우크라이나 전선도 아니고) 여기서 난리를 치느냐"고 항의했다. 그들이 철수할 때 박수를 쳐준 것도 피를 흘리지 않고 스스로 떠난다는 데 대한 환영의 의미였다.

5) 프리고진이 반란을 생각했다는 것은, 크렘린의 권력투쟁 혹은 푸틴 대통령의 일부 측근이 비호한, 권력 내부에 문제가 있었다는 뜻이다. 프리고진은 미 정보기관이 이미 알고 있었던 것처럼 반란을 준비하고 있었다. 지난 겨울 이후로, 특히 5월 초부터는 그가 폭동을 일으킬 조짐이 완연했다. 그럼에도 크렘린은 프리고진을 무력화하기는 커녕, 계속 무기와 돈을 지원하고 그를 PR하도록 했다. 누가 왜? (국방부 지휘 체계를 뒤흔드는) 프리고진의 언행을 '크렘린의 이익을 위한 교활한 계획'이라고 포장한 것은 누구인가? 푸틴 대통령과 크렘린이 또 SNS인 텔레그램에 '언론의 자유'를 무한정 허용하는 이유가 뭘까? 크렘린내 권력투쟁의 결과인지, 단순히 일시적인 통제력 상실인지 명확하지 않다.

6) 군사 반란은 우크라이나 전쟁이 내전과 같은 모습으로 러시아의 국가 체제를 위협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여줬다. 이는 가능하면 특수 군사작전을 어느 정도 선(예를 들면, 한국전쟁 시나리오)에서 끝내는 것이 맞다고 믿는 러시아측 인사들의 입장을 강화시켜 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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