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CIS 토크) '흑해 곡물 협정' 체결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러시아CIS 토크) '흑해 곡물 협정' 체결은 누구를 위한 것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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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승인 2023.08.02 04: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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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해를 통한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1년 만에 또 멈춰섰다. 러시아가 '흑해 곡물 협정'에서 탈퇴했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는 즉각 곡물 수출을 위한 비상 대책인 '플랜 B'의 가동에 들어갔다. 다뉴브강(江)을 통해 루마니아 흑해 항구를 이용하는 방안이다. 하지만 러시아가 오데사 등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는 물론, 다뉴브강 항만까지 공습 대상을 넓히면서 향후 전망은 불투명하다.

다행히 그리스와 이스라엘, 터키-조지아 국적의 곡물 운반선들이 최근 잇따라 다뉴브강의 우크라이나 항만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또 우크라이나는 다뉴브강을 거슬러 올라가 크로아티아의 아드리아해 항만을 통한 곡물 수출 방안도 추진하고 있다고 밝혔다. 우크라이나로서는 가능한 모든 곡물 수출 항로를 찾아가는 느낌이다. 우크라이나가 이렇게 먼 길을 돌고 돌아 곡물을 수출해야 하는 이유가 뭘까?

한국외대 국제지역대학원 러시아-CIS 학과가 매월 발간하는 '러시아CIS 토크' (Russia-CIS Talk)는 2023년 제 8호(2023년 8월 1일자, https://ruscis.hufs.ac.kr)에서 지난 1년간 지속되다가 중단된 '흑해 곡물 협정'을 다뤘다. 류지환(석사과정, 러시아 경제·CIS 전공)씨가 쓴 '흑해 곡물 협정 누구를 위한 체결인가?' 다. 이 글을 소개한다/편집자.

◇패닉에 빠진 국제 곡물 시장 

2022년 2월 발발한 러시아-우크라이나 전쟁은 세계 곡물 시장 가격을 천정부지로 폭등시켰 다. 세계의 곡창지대로서 오랜 기간 글로벌 식량 공급 기지 역할을 해왔던 두 나라 사이에 전 쟁이 터졌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의 농경지는 러시아군의 폭격 등으로 대거 파괴되었다. 농업 종사자 수도 줄어들었다. 이는 자연스럽게 곡물 생산량 감소로 이어졌다. 

2022년~2023년 우크라이나의 밀 생산량은 전년 대비 38.7% 수준으로 떨어졌다.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량도 1,235만 톤에서 476만 톤으로 전년 대비 약 61% 정도 대폭 감소했다. 곡물 수출량 급감은 일정 수준 생산량 감소 때문이기도 하지만, 우크라이나의 흑해 주요 항구에 대한 러시아의 전면 해상 봉쇄에서 기인한 바 크다. 말하자면 전쟁으로 곡물 수출길이 막힌 것이다.

공급망이 불안정해진 곡물 소비국들은 수입선을 변경해야 했다. 국제 유가의 고공행진으로 물류비가 늘어나 수입 비용도 대폭 증가했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서구의 강력한 제재로 러시아산 곡물과 비료의 수출까지 제한되면서 국제 사회의 식량난이 더욱 극심해졌다. 여기에 세계 제 2위 밀 생산국 인도마저 자국산 곡물 수출을 중단하면서 국제 곡물 시장은 큰 혼란에 빠졌다.

인도 정부는 폭염으로 인한 생산량 감소와 흑해 지역의 대체 수요 급증, 밀 가격 상승에 따른 정부 조달 물량 확보 부족 등을 이유로 밀 수출 금지 조치를 단행했다. 이에 따라 글로벌 곡물 수급이 불안정해지면서 농산물 가격이 치솟자, 흑해로부터의 곡물 수입 의존도가 높은 국가들, 특히 중동 지역과 아프리카 국가들이 가장 큰 고통을 받았다. 북아프리카 주요국들의 밀 수입 의존도는 50%에 근접하는데, 이집트는 옥수수 대외 의존도도 상당히 높다.

◇흑해 곡물 협정 체결 배경

우크라이나 전쟁 발발 이후 국제 곡물가격 급등과 중동·아프리카 지역 등의 극심한 식량난이 국제 사회의 심각한 문제로 대두되었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유엔(UN)과 튀르키예(터키)가 나서 ‘해상 안전 항로'를 통한 곡물 수출 재개 방안을 추진했다. 관련국을 설득하고 협상한 결과, 2022년 7월 22일 UN-우크라이나-터키-러시아 4자간 ‘흑해곡물수출협정(Black Sea Grain Initiative)’이 맺어졌다.

격렬한 전쟁 와중에도 곡물 협정 체결이 성사된 배경은 무엇일까?
우선, 글로벌 곡물 위기의 해소를 위해 러-우크라 양국에 책임 있는 조치를 요구하는 지구촌 여론의 강한 압박이 주효한 듯 보인다. 국제 사회가 곡물 시장 가격의 조속한 안정과 개발 도상국의 식량난 해소를 위해 협상을 통한 수출길 복원, 즉 곡물 공급망 복원을 강력히 요구한 것이다. 물론, UN-터키의 적극적인 중재 노력도 간과할 수 없다.

그러나 협정 체결이 성사된 진짜 이유는 따로 있다. 곡물 수출 제한으로 심대한 경제적 타격을 입은 전쟁 당사국들의 이해관계 일치, 즉 자승자박의 매듭을 풀어야 한다는 러-우크라 양측 간 정치적 교감신경의 작동이 핵심 배경으로 작용한 듯 보인다. 키예프(키이우)와 모스크바 모두에게 곡물 수출 재개를 통해 고갈된 재정 곳간을 채워야 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다.

특히 러시아는 우크라이나산 곡물의 흑해 해상 수출 보장을 대가로 자국산 농산물 및 비료의 안정적 수출과 서구의 금융제재 해제를 노렸다. 뒤집어 말하면, 러시아의 요구와 이익이 보장되지 않으면, 곡물 협정은 언제든지 휴지 조각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할 수 있다.

흑해 곡물 협정 체결/출처:United Nations

◇협정 내용과 이행 현황

흑해 항로의 안전 보장 합의를 통한 곡물과 비료 수출을 허용한 곡물 협정의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먼저, 우크라이나 주요 항구(초르노모르스크, 오데사, 피브데니)를 개방하고 합동조정센터를 만들어 군함과 항공기, 무인기가 해상의 인도주의 회랑에 접근할 수 있는 거리를 결정한다. 이 협정에 참여하는 모든 선박은 검색 대상이 되며 터키 해협 인근에서 검사를 받는다. 문서는 서명일(7월 22일)로부터120일 동안 유효하고 기본적으로 어느 일방이 해지 의사를 표시하지 않을 경우, 협정은 자동으로 연장된다. 

마침내 협정이 체결되면서 국제 곡물 운반선들이 우크라이나 흑해 항구를 안전하게 드나들 수 있게 되었고, 일시적으로나마 곡물 공급망이 복구되었다.

협정은 체결 이후 지금까지 총 다섯 차례 발효됐다. 처음 발효된 협정은 120일간(2022.07.22~2022.11.19) 유효했지만, 2022년 10월 29일 러시아 측이 갑자기 협정 참여 중단을 선언했다. 키예프 정권이 흑해에 있는 러시아 함대와 곡물 통로 보안에 관계된 민간 선박에 테러 공격을 감행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이후 우여곡절 끝에 2022년 11월 20일부터 2023년 3월 19일까지 한 차례 협정 연장이 이루어졌다. 하지만 또 한 차례 더 연장된 협정은 러시아가 딴지를 걸어 유효기간이 120일에서 60일로 줄어들었고, 이후 똑같은 조건으로 두 차례(2023.03.20.~2023.05.16. 2023.05.17~202 3.07.18) 더 연장되었다. 

연장 기간의 축소 이유는 크렘린이 요구한 러시아 농업은행의 국제은행 결제망 재연결과 러시아 농업 및 비료 관련 기업들의 해외 자산 동결 해제, 암모니아 수송관의 우크라이나 구간 재가동 등의 조건이 이행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슬아슬한 재협상 줄타기로 인해 가장 큰 피해를 보고 있는 국가는 중동과 아프리카 등지의 개발도상국들이다.

아프가니스탄으로 떠나는 곡물 운반선/출처:United Nations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지는 저개발 곡물 수입국

앞서 언급한 것처럼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의 흑해 곡물 의존도는 매우 높다. UN과 터키는 개발도상국들의 식량 안보를 위해 흑해 곡물 협정의 체결을 추진했다고 강조하지만, 정작 아프리카와 중동 지역으로 유입되는 흑해 곡물은 전체 수출량의 13.5%에 불과하다.

UN 자료에 따르면 흑해 수출 곡물의 85% 이상이 서유럽과 아시아·태평양 지역으로 향했다. 세계은행(World Bank)도 흑해 수출 곡물이 중·저소득 국가들보다 고소득 국가들에 약 80% 가량 수출된다고 지적했다. 러시아는 실제로 고통받는 개발도상국들로 수출되는 곡물량을 늘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했지만, UN은 흑해 곡물 수출의 재개로 세계 곡물가가 하락해 개발 도상국들의 식량 안보 위험이 해소되고 있다고 반박했다.

국제 곡물가가 밀 선물가격을 중심으로 하락한 것은 사실이다. 하지만 달러 강세의 여파로 환 율이 급등했기 때문에 곡물가가 안정되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흑해에서 곡물을 수출하는 선박 의 검사도 지난 1년간 하루 평균 6척에 그치면서 개발도상국들, 특히 아프리카와 중동 국가들은 여전히 식량 위기 속에 놓여 있었다.

흑해 곡물 협정의 연장과 재연장을 보면서 언뜻 ‘경전하사'(鯨戰鰕 死), 즉 ‘고래 싸움에 새우 등 터진다'는 속담이 떠오른다. 협정이 중단될 위기에 처할 때마다 협정 당사국들의 이득을 위한 싸움으로 전쟁과는 무관한 저소득 국가들은 심각한 생존 위협을 받고 있다. 지구촌 시민들의 여망처럼 전쟁이 조속히 종식되어 곡물 공급망이 완전히 회복되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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