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의 흑해 곡물 협정을 띄우는 러시아, 에너지에 이어 곡물 시장 주도권 노린다
제 2의 흑해 곡물 협정을 띄우는 러시아, 에너지에 이어 곡물 시장 주도권 노린다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8.22 04:4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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러-우크라-튀르키예(터키)-유엔 4자 '흑해 곡물 협정'을 지난 달 파기한 러시아가 세계 곡물 시장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시동을 걸었다. 곡물 시장 여건은 일단 러시아에게 매우 유리하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 (8월 20일자)에 따르면 쌀 가격은 지난 한 달 동안 세계 곡물 시장에서 크게 올랐다. 지난 7년간 잠잠하던 '엘니뇨 현상'이 아시아 지역을 다시 덮치면서 가뭄과 같은 '이상 기후'로 인도 등 주요 국가들의 쌀 수확량이 크게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인도는 지난 7월 국내 시장에서 쌀 가격이 11.5% 급등하자, 즉각 쌀 수출을 금지했고, 아랍에미레이트연합(UAE)도 향후 4개월간 쌀 수출을 중단하기로 했다. 태국은 이달 초 가뭄에 따른 물 부족을 이유로 농민들에게 벼 재배를 줄이도록 했다. 엘니뇨 현상에 따른 자연재해 피해가 적은 베트남은 쌀 수출을 늘릴 계획이지만, 한 국가 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시아권의 쌀 시장 점유율은 40%가 넘는다.

국내에서 팔리는 인도쌀/사진출처:아시안 푸드

쌀은 이미 10년만에 가장 비싼 가격인 톤(t)당 650달러에 거래되고 있다. 유엔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7월 쌀 식품 지수는 전달 대비 2.8%, 전년도 대비 거의 20% 올랐다. 쌀값 급등은 (포괄적인) 식량지수 상승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됐다. 식량지수는 7월에만 1.3% 오르며 123.9포인트를 찍었다.

우크라이나의 저명한 경제학자이자 '경제토론클럽(Экономический дискуссионный клуб, Economic Discussion Club) 이사인 올레그 펜진은 "쌀 가격 동향은 아직 시작에 불과하다"며 "흑해 곡물 협정이 파기된 뒤 밀과 옥수수 등 주요 곡물의 가격이 8~12% 급등했고, 가까운 장래에 가격이 안정되지는 않을 것"으로 내다봤다. 

쌀 부족 현상은 러시아에게 곡물 시장의 주도권 장악에 호기가 되고 있다. 인도는 쌀 부족 문제를 해결하고, 식료품 가격 상승을 막기 위해 러시아로부터 대량의 밀 수입 협상을 벌이고 있기 때문이다. 로이터 통신에 따르면 인도의 밀 수입 규모가 900만 톤, 최대 1,500만 톤에 이를 것이라고 한다. 러시아도 이번 기회를 놓치지 않기 위해 인도와의 정부간 거래를 통해 톤당 25~40달러 할인된 가격으로 수출을 밀어부치고 있다. 

밀 수확 모습/텔레그램 

인도와의 밀 거래 협상이 성사되면, 러시아는 곡물 수출 물량을 크게 늘릴 수 있다. 새로운 곡물 수출 루트도 준비중이다. 러시아가 튀르키예, 카타르와 함께 추진하는 '제 2의 흑해 곡물 협정'이다.

주목되는 것은 새 협정에서는 우크라이나가 아예 배제된다는 점이다. '흑토의 나라' 우크라이나를 아예 세계 곡물 시장에서 내쫓겠다는 러시아 측의 음모나 다름없다.

rbc 등 현지 매체에 따르면 새 곡물 협정은 큰 가닥을 잡은 것으로 알려졌다. 푸틴 대통령의 특사 자격으로 타타르 자치공 수반인 루스탐 민니하노프가 20일 헝가리 수도 부다페스트에 도착했고, 셰이크 타밈 빈 하마드 알타니 카타르 국왕도 부다페스트로 향했다. 레제프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의 부다페스트 방문도 발표됐다. 그들은 그 곳에서 친러 성향의 빅토르 오르반 총리를 사이에 두고 협정 초안을 만들어갈 것으로 전해졌다. 

새 협정의 취지는 우크라이나 전쟁으로 초래된 아프리카 대륙의 빈곤 문제를 해결하자는 것. 터키가 러시아 곡물을 흑해를 통해 아프리카로 운반하고, 카타르는 이를 재정적으로 보증한다는 구상이다. 

지난달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열린 러시아-아프리카 정상회의에서 푸틴 대통령은 아프리카 정상들로부터 '흑해 곡물 협정'의 재개 압력을 받았다. 그 자리에서 푸틴 대통령은 협정 파기의 당위성을 설명하면서, 러시아가 우크라이나를 대신해 상업적이든 무상 원조든 아프리카에 곡물을 보내겠다고 약속했다. 러시아에게 새 협정은 그 약속을 지키기 위한 방안이다. 

그 결과는 세계 곡물 시장 판도를 바꿀 만큼 큰 폭발력을 지닐 것으로 예상된다. 러시아가 인도와 밀 수출 계약을 체결하고, 새 협정에 따라 아프리카로 곡물 공급을 시작하면, 러시아의 밀 점유율은 크게 높아질 게 분명하다. 

우크라이나 곡물을 싣고 흑해를 항해하는 선박들/현지 TV 채널 NTV캡처

유엔 식량농업기구(FAO)에 따르면 러시아는 2022~2023 회계연도(2022년 7월~2023년 6월)에 4,100만 톤 이상의 밀을 수출했다. 전 세계 밀 거래량(약 2억 톤 중)의 20%를 차지했다. 여기에 인도로 900만 톤의 밀을 공급하면, 러시아의 점유율은 25%가 된다. 스트라나.ua는 "석유와 가스 등 에너지보다 더 강력한 러시아의 곡물 시장 영향력을 확보할 시장 점유율"이라고 평가했다. 

러시아는 '흑해 곡물 협정'이 중단된 뒤 최근까지 전년 대비 1.6배 늘어난 약 330만 톤의 곡물을 해외로 내보냈다. 사우디아라비아로의 수출은 2.3배(최대 43만톤), 이집트로의 수출은 85% 늘어났다고 한다. 수출 지역도 카타르와 수단 등 중동·아프리카로 확대하고 있다. 그동안 우크라이나 곡물이 장악하고 있던 곳이다.

빅토리아 아브람첸코 러시아 부총리는 2023~2024 회계연도(2023년 7월~2024년 6월)에는 전년도의 5천만톤을 넘어 최대 6천만 톤의 곡물을 수출할 수 있을 것으로 예상했다. 2021~2022 회계연도(3천800만 톤)와 비교하면 거의 1.6배나 증가한 규모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땅에서 수확한 곡물도 포함됐기 때문에 그같은 예측이 가능하다. 올해 곡물 수확량(우크라이나 점령지 포함)도 1억3천만 톤에 이를 전망이다. 

상대적으로 우크라이나는 더 큰 위기를 느끼고 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펜진 경제토론클럽 이사는 "흑해를 통해 세계시장으로 나갔던 러시아와 우크라이나, 카자흐스탄 3국의 곡물 수출 균형이 깨졌다"며 "우크라이나는 흑해 봉쇄로 수출 물류 비용이 크게 높아져 세계 시장에서 가격 경쟁력을 잃게 될 것"으로 우려했다. 또 "전쟁 전에는 우리(우크라이나)가 인도와 동남아 일부 국가에도 곡물을 수출했지만, 전쟁과 흑해 봉쇄 등으로 이 시장을 러시아에서 빼앗길 수 있다"고 했다.

스트라나.ua(8월 19일자)에 따르면 러시아가 흑해를 다시 봉쇄한 뒤(흑해 곡물 협정 파기), 지난 4주간(7월 17일~8월 15일) 우크라이나의 곡물(식물성 기름 포함) 수출은 3분의 1이 준 320만 톤에 그쳤다고 미 블룸버그 통신이 전했다. 올 하반기에도 수출 물량이 또 4분의 1 가량 줄어들 것으로 전문가들은 내다봤다. 우크라이나는 곡물 수출 감소로 GDP의 3%를 날릴 판이다.

우크라이나 경제학자 펜진/사진출처:유튜브

가장 큰 타격은 역시 인도 시장이다. 펜진 이사는 "인도는 이미 러시아와의 무역을 11배 늘렸는데, 지난 6개월 동안 러시아 석유 수입량이 8배나 폭증했다"며 "인도가 G20 정상회의에 젤렌스키 대통령을 초청하지 않은 것도 보통 일이 아니다"고 지적했다. 인도의 친러시아 성향을 우려하는 발언이다.

하지만, 인도로서는 러시아가 에너지든 곡물이든 싼 가격에, 그것도 루블화 결제를 허용하니 굳이 마다할 이유가 없어 보인다. 시장에서 독과점으로 가는 첫 발이 바로 가격 파괴로 경쟁자들을 고사시키는 마케팅이라는 점을 떠올리게 하는 대목이다.

우크라이나에게는 무엇보다 가성비가 높은 대체 수출 루트 확보가 시급하다. '흑해 곡물 협정 파기' 후 플랜 B를 가동했지만, 물류 비용이 매우 비싸졌다. 펜진 이사는 "우크라이나의 곡물 수출이 월 400만 톤에 이를 전망이지만, 값비싼 물류비와 세계 시장 경쟁을 고려할 때, 농부들은 기존의 수익을 기대하기 어렵다"고 내다봤다. 그는 "이전에 우리가 이집트 곡물 시장의 약 30%를 점유했다면, 지금은 9%를 넘지 않는다"고 지적했다. 

러시아의 흑해 봉쇄로 우려되는 우크라이나 곡물 수출/사진출처:페북 navy.mil.gov.ua

물론, 아프리카 대륙에는 러시아 곡물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러시아는 주로 식용 곡물(밀)을 공급한다면, 우크라이나는 사료용 밀과 옥수수를 대주고 있다. 

그러나 이제는 우크라이나도 수확량을 고민해야 할 때다. 우크라이나는 남부 자포로제(자포리자)주(州)와 헤르손주등 흑토 일부를 러시아에 빼앗겼고, 카호프카 댐 붕괴로 막대한 농경지 피해를 입었다. 전쟁 이전과 같은 수확량을 기대하게 어렵다. 

러시아가 식량 주도권을 노리는 이유는 간단하다. 가스 등 에너지로 유럽연합(EU)를 쥐고 흔들었듯이, 식량 수입국인 글로벌 사우스(남반구 국가들)와의 지정학적 관계를 더욱 두텁게 가져갈 수 있다. 나아가 이들을 우크라이나-서방 진영의 반러시아 동맹을 제어하는 지렛대로 활용할 수 있다. 우크라이나가 해상드론으로 러시아 흑해 항구를 공격하고, 선박 호위 군함을 파괴하는 것도, 흑해를 통한 러시아의 곡물 수출을 막으려는 서방 측의 어떠한 시도도, 이들 국가들이 가장 먼저 반대하고 나설 것이기 때문이다.

FAO에 따르면 에티오피아, 수단, 나이지리아, 소말리아, 아프가니스탄, 예멘 등이 가장 심각한 식량 부족 국가들이다. 중앙아프리카의 니제르에서 친러 쿠데타가 일어난 것도, 기존의 미국과 프랑스 등 서방 국가들을 물러나라고 외치는 것도, 궁극적으로 식량 문제와 무관하지 않다. 이들 국가에게 식량을 공급하겠다는 러시아의 계획은, 결국 흑해 주도권을 놓지 않겠다는 선언이나 진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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