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신감에 뿔난 푸틴 대통령? 에르도안의 정상회담 러브콜을 계속 뿌리치는 까닭은
배신감에 뿔난 푸틴 대통령? 에르도안의 정상회담 러브콜을 계속 뿌리치는 까닭은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8.23 03: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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푸틴 대통령과 레제프 에르도안 튀르키예(터키) 대통령간의 '브로맨스'가 심상치 않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대선 승리'라는 험난한 길을 걸은 뒤 두 정상 간의 관계는 더욱 돈독해질 것으로 예상됐다. 서방 측이 민 야권 대선후보를 견제하고 에르도안 대통령을 구하기 위해 푸틴 대통령은 파기 직전의 '흑해 곡물 협정'을 되살리는 등 외교적 지원을 아끼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에르도안의 대선 승리 후 두 사람의 '브로맨스'는 예상을 빗나갔고, '흑해 곡물 협장'도 지난 7월 파기됐다.

이란에서 가진 푸틴-에르도안 대통령의 정상회담/사진출처:크렘린.ru

아슬아슬한 푸틴-에르도안 사이를 보여주는 단적인 예가 바로 정상회담이다. 비교적 쉽게 전화통화하고, 기회를 만들어 만났던 두 사람이 이제는 정상회담 일정조차 제대로 잡지 못하고 있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푸틴 대통령의 터키 방문을 발표하면, 크렘린측에서 "아직 결정된 바 없다"고 부인하는 식이다.

지난 2일 어렵게 성사된 양국 정상 간의 전화 통화가 끝난 뒤 '푸틴 대통령의 터키 방문이 결정됐다'는 터키 대통령실의 발표에, 크렘린은 '정상회담 준비를 위한 접촉을 계속하기로 했다'고 어깃장을 놨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기회가 있을 때마다 '푸틴 대통령이 8월 말 터키를 방문할 것'이라고 예고했다. 하지만, 푸틴 대통령은 터키로 떠날 의향이 없어 보인다. 급기야 터키의 한 당국자는 21일 러시아 국영 타스 통신에 "현재로선 터키에서 양국 정상회담을 가질 가능성이 낮다"며 "기회와 여건이 된다면, 에르도안 대통령이 러시아를 방문할 가능성도 있지만, 이 역시 분명한 건 아직 없고 가능성만 열려 있다"고 말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터키 현지 언론은 22일 에르도안 대통령이 러시아 소치로 가 푸틴 대통령을 만날 것이라고 전했다. 핵심 의제는 파기된 '흑해 곡물 협정'을 되살리는 것이라고 했다. 앞서 에르도안 대통령이 정상회담을 아예 내달 인도에서 열리는 G20 정상회의나, 유엔 총회로 미뤘다는 보도도 나왔다. 

두 정상이 만나기가 쉽지 않을 것이라는 느낌이 절로 든다. '브로맨스' 라던 두 사람의 관계가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서방 전문가들은 대선 후 에르도안 대통령이 취한 '친서방 정책'을 든다. 굳이 '친서방'이라고 할 것도 없다. 터키는 엄연히 나토(NATO) 회원국이다. 중동에 위치하고 있다는 지정학적 이유로 러시아와 서방 진영 사이에서 줄타기 외교를 해왔지만, 언제든지 러시아와 각을 세울 수 있는 터키다.

문제는 두 정상간의 개인적인 신뢰가 깨진 것이다. 우크라이나 전쟁 초기, 최대 격전기였던 마리우폴의 아조프(아조우)스탈 제철단지에서 결사항전했던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의 '아조프 연대'가 러시아군에 항복한 뒤, 러-우크라의 포로 교환 협정에 따라 '아조프 연대' 부대원들은 풀어주되, 주요 지휘관들은 전쟁이 끝날 때까지 터키 측이 억류하기로 했는데, 에르도안 대통령이 이 약속을 저버린 것이다. 그것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의 터키 방문 선물로 '아조프 연대' 주요 지휘관들을 석방했다. 

석방된 '아조프 연대' 주요 지휘관들/텔레그램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은 지난 7월 8일 터키 측과의 협상에 따라 데니스 프로코펜코 아조프 특수 연대 사령관과 세르게이 볼린스키 제 36해병여단의 사령관 직무대행 등 터키에 억류중이던 6명의 군 고위인사들이 석방됐다고 발표했다. 이들은 귀국길에 오른 젤렌스키 대통령 전용기를 타고 키예프(키이우)로 돌아왔다. 그리고 이들의 금의환향을 축하하는 성대한 환영식도 열렸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왜 갑자기 아조프 연대 주요 지휘관들을 석방했는지 설왕설래가 오갔다. 가장 큰 이유로는 미국과의 '이면 합의'가 꼽혔다. 또 러시아가 더이상 '흑해 곡물 협정'을 연장할 뜻이 없다는 것을 알고, 터키 측이 경고 차원에서 지휘관들을 미리 석방했다는 분석도 나왔다. 하지만, 러시아의 '흑해 곡물협정' 파기와 터키의 아조프 지휘관 석방 간의 전후 관계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며칠이 지난 뒤 스트라나.ua(7월 11일자)는 에르도안 대통령이 스웨덴의 나토 가입 승인 등을 놓고 미국과 가진 비밀 협상에서 아조프 지휘관들의 석방을 카드로 내놓은 것으로 분석했다.

터키는 스웨덴의 나토 가입을 승인(나토 가입은 모든 회원국들의 승인을 받아야 한다/편집자)해주는 대신, 미국으로부터 F-16 전투기를 받고, 50년 숙원이던 유럽연합(EU) 가입 지지를 요구한 것으로 전해졌다. EU는 그동안 터키의 민주화와 인권 상황, 언론 자유, 사법제도의 독립성 등을 이유로 가입에 반대해 왔다.

미국의 F 16 전투기/사진출처:픽사베이.com
리보프에서 열린 아조프 연대 지휘관 귀환 환영대회에 참석한 젤렌스키 대통령/영상 캡처

미국은 줄다리기 끝에 터키의 요구를 수락하면서 아조프 지휘관들의 석방을 추가로 요구했을 가능성이 높다고 스트라나.ua는 추측했다. 터키는 또 T-155 곡사포를 우크라이나에 제공하기로 약속했다. 

크렘린은 아조프 지휘관들이 전격 석방되자 당혹감을 감추지 못했다. 페스코프 크렘린 대변인은 즉각 터키측의 결정을 '약속 위반'이라고 크게 반발했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이후 행보도 푸틴 대통령을 자극하기에 충분했다. 아조프 지휘관들 석방에 대한 유감 표시는 커녕, 다음달(8월) 앙카라에서 푸틴 대통령을 만나 '흑해 곡물 협정'을 최소한 3개월 이상 연장하고 싶다고 말했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리투아니아 빌뉴스 나토 정상회담(7월 11, 12일)에 간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조프 지휘관들의 석방을 포로교환 협정 위반으로 간주하지 않는다"며 "모스크바와 갈등할 이유도 없다"고 한 술 더 떴다. "아조프 지휘관 6명을 전쟁이 끝날 때까지 터키에 억류하기로 한 것은 러-우크라간의 약속일 뿐, 터키와는 관계가 없다"고 강조했다. "터키는 그들에게 망명처만 제공했을 뿐"이라고도 했다.

터키에서 석방된 뒤 재활을 거쳐 복귀한 프로코펜코 아조프 연대 사령관/아조프 미디어 텔레그램

시기적으로도 묘했다. 러시아 용병 '바그너 그룹'의 수장 프리고진의 6·24 군사반란의 충격이 채 가시기 전이었다. 푸틴 대통령으로서는 석방된 아조프 연대 사령관이 다시 전선으로 복귀한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심사가 뒤틀릴 게 분명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외교적 성과로 꼽아온 '흑해 곡물 협정'이 일고의 가치도 없이 파기된 건 어쩌면 당연하다. 

에르도안 대통령의 태도 변화에 대해 터키 전문가들은 "아조프 지휘관들의 석방과 T-155 곡사포의 우크라이나 제공 약속은 터키 정부의 정책 전환 신호"라고 해석했다. 터키 측이 노리는 것은 서방의 경제 지원이다. 터키 리라화가 끝없이 추락하는 경제 위기를 구해줄 지원군을 필요했다. 그 대신 터키가 양보해야 할 것은 러시아와의 관계 축소다.

그러나 터키의 한 신문(Hürriyet)은 정부 소식통을 인용해 "터키는 러시아에 등을 돌리지 않았다"고 썼다. 터키는 러시아의 값싼 에너지와 제재 회피 '허브'로 챙겨온 경제적 이득, 러시아 관광객 유치, 서방 기업들이 떠난 러시아 시장 진출 등 포기할 수 없는 이익도 적지 않다. 

문제는 눈에 띄게 냉랭해진 러시아의 태도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푸틴 대통령은 지난 7월 29일 러-아프리카 정상회담이 끝난 뒤 '다음달(8월)에 터키를 방문할 것인지'에 대한 기자들의 질문에 "두고 보자"며 "누가 상대국을 방문할 것인지 아직 결정되지 않았다"고 답했다. 아조프 연대 지휘관들의 석방에 대해서는 "(넘기지 않기로) 합의가 있었다"며 불쾌함을 감추지 않았다. 

에르도안 대통령과 악수를 나누는 푸틴 대통령/사진출처:크렘린.ru

하지만, 에르도안 대통령과의 냉랭한 관계를 언제까지나 지속할 수는 없다. 터키는 우크라이나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를 개시한 러시아를 비난하면서도, 서방의 대(對)러시아 제재에 동참하지 않는 등 동유럽의 헝가리와 함께 서방 진영에서 유이(唯二)한 국가다. 무역 제재를 회피할 수 있는 통로이기도 했다.

스트라나.ua는 "우리 모두는 터키가 러시아 비행기를 격추한 2015년을 기억한다"며 "두 나라는 외교 관계를 끊기 직전이었고, 모스크바는 앙카라(터키의 수도/편집자)에 경제제재를 가했다"고 되돌아봤다. 실제로 두 나라는 사건 발생 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존의 돈독한 관계를 회복했다. 

푸틴-에르도안 두 정상도 20년 이상 끈끈한 관계를 유지해 왔다. 서로를 “친애하는 친구”라고 부르며, 기회가 있을 때마다 만났다. 2019년 8월 모스크바 외곽에서 열린 '모스크바 에어쇼'에서는 두 사람이 함께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전시장을 돌아보는 모습이 포착되기도 했다. 공식적인 정상회담만도 모두 13차례나 된다. 

에르도안 대통령은 지난 2015년 러시아의 시리아 공습을 지지했고, 러시아산 S-400 방공 미사일을 사들였다. 미국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터키를 차세대 전투기 프로그램에서 제외하고, F-16 전투기도 지원하지 않기로 했다. 결과적으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에르도안 대통령은 아조프 연대 지휘관들을 석방했고, 푸틴 대통령과는 껄끄러운 관계로 돌아선 셈이다. '양다리 걸치기'의 숙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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