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란드의 대우크라 분노, 그 시작과 끝은? 푸틴-에르도안 대통령 갈등보다 심각
폴란드의 대우크라 분노, 그 시작과 끝은? 푸틴-에르도안 대통령 갈등보다 심각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09.23 13:0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1년 6개월을 훌쩍 넘어선 우크라이전 전쟁에서 깔맞춤 '짝'을 찾으라면, 러시아-튀르키예(터키), 우크라이나-폴란드를 들 수 있다. 러-우크라 양측을 각각 도와주는 터키-폴란드의 기세는 거의 구원자 수준이다.

하지만, 장기전에는 장사가 없는 법인지, 그 짝 사이에도 삐걱대는 소리가 들린다. 터키가 젤렌스키 대통령의 방문 선물로, 러시아와 사전 협의도 없이, 억류중이던 우크라이나 아조프(아조우) 연대 지휘관들을 풀어주면서, 푸틴 대통령-에르도안 터키 대통령 사이의 '브로맨스'(bromance)에 금이 갔고, 러시아의 '흑해 곡물 협정' 파기로 이어졌다. 에르도안 대통령이 지난 4일 서둘러 러시아 흑해 휴양지 소치로 날아가 푸틴 대통령과 만나 봉합을 시도했다. 

푸틴 대통령이 지난 4일 소치에서 에르도안 터키 대통령을 영접하는 모습/사진출처:크렘린.ru

짤떡 궁합을 과시하던 우크라이나와 폴란드는 '흑해 곡물 협정 파기' 이후 곡물 수출 문제로 놓고 갈등을 빚기 시작했다. 제 2차 세계대전 당시 나치 독일과 전후 옛 소련에게 억압당한 비운의 역사를 공유하는 동병상련의 두 나라로서는 예상을 넘어서는 사건 진전이었다. 폴란드가 그 어느 나라보다 우크라이나에 대러 항전 무기를 보내는 데 앞장서고,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이 폴란드로 편입될 것이라는 '가짜뉴스'(?)가 나올 정도였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양국 갈등의 근본 원인은 폴란드로의 우크라이나 농산물 반입 문제다. '흑해 곡물 협정'의 파기 이후, 우크라이나는 폴란드 등 육로와 다뉴브강 수로 등을 통해 유럽 국가로의 농산물 수출을 늘려왔다. 값싼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유입은 폴란드 등 동유럽권에서 농산물 가격 폭락 등 심각한 부작용을 불러 일으켰다. 

유럽연합(EU)이 재빨리 대책 마련에 나섰다. 지난 5월 폴란드와 불가리아, 헝가리, 루마니아, 슬로바키아 등 5개국에는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판매를 금지하고, 경유만 할 수 있도록 한시적으로 수입을 금지했다. 그리고 4개월여가 지난 이달 15일, EU는 이들 5개국의 시장 왜곡 현상이 해소됐다고 판단, 우크라이나산 농산물의 수입 금지 조치를 다음 날부터 해제하기로 했다.

우크라-폴란드 갈등의 시작점은 바로 여기다. 폴란드는 헝가리, 슬로바키아와 함께 자국 농민을 보호한다는 명분을 앞세워 EU의 금수 조치 해제를 받아들이지 않기로 했다. 이에 발끈한 우크라이나는 이들 3개국을 세계무역기구(WTO)에 제소할 것이라고 발표했다. '농업 전쟁'의 선포나 다름없다.

3개국 중에서 폴란드가 가장 반발하는 것은 내달 총선(10월 15일)에 미칠 영향 때문이다. 농촌 지역을 텃밭으로 두고 있는 집권 여당 '법과정의당'(PiS)은 EU의 수입 금지 조치 해제를 용인했다가는 자칫 정권을 제1야당인 '시민플랫폼'에 넘겨줘야 할 판이다. 

푸틴-에르도안 대통령이 소치에서 만났듯이, 유엔 참석차 미국 뉴욕으로 날아간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과 두다 폴란드 대통령이 현지에서 만나 담판을 지을 것으로 전망됐다. 하지만 양국 정상의 만남은 취소됐고, 감정적인 성명만 오갔다.

젤렌스키 대통령의 19일 유엔 총회 연설/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폴란드의 감정을 폭발시킨 것은 젤렌스키 대통령의 19일 유엔총회 기조 연설이다. 그는 (폴란드 등을 겨냥해) "일부 유럽 국가들이 정치 무대에서 연대해 '스릴러 연극'을 하고 있다"며 "그들은 자신의 역할을 하고 있는 것처럼 보일 수도 있지만, 실제로는 '모스크바 배우'를 위한 무대를 만들었다"고 비판했다. 결과적으로 (우크라이나를 침공한) 러시아만 이롭게 하고 있다는 주장이다. 폴란드는 즉각 자국 주재 우크라이나 대사를 외무보로 초치해 강한 항의의 뜻을 전달했다.

이튿날(20일) 마테우시 모라비에츠키 폴란드 총리는 무기 지원 중단 카드까지 꺼냈다. 그는 기자들에게 “폴란드 군대를 더 현대적인 무기로 무장시켜야 하기 때문에, 우크라이나에 더 이상 무기를 주지 않을 것”이라며 "우크라이나가 농산물 분쟁을 확대할 경우, 수입 금지 품목을 늘릴 것"이라고 경고했다. 양파와 토마토, 양배추, 사과 등 일부 폴란드 야채및 과일의 수입을 금지하기로 한 우크라이나 정부의 결정에 대한 보복 조치의 일환이다. 

두다 폴란드 대통령도 감정을 억제하지 못했다. 그는 "깊은 물속으로 빨려들어가고 있는 사람에 의해 해를 입지 않도록 우리 스스로를 보호해야 한다"며 우크라이나를 물귀신(?)에 비유했다. 

화기애애한 시절, 젤렌스키-두다 대통령의 바르샤바 만남/사진출처:우크라 대통령실 
폴란드 모라비에츠키 총리/사진출처:X(옛 트위트) @MorawieckiM

폴란드에 있는 우크라이나 난민들에 대한 지원 중단 요구도 터져 나왔다. 거주 요건을 없애고 취업 허가, 교육비 무료, 건강 관리 및 가족 혜택 제공 등을 중단하자는 주장이다. 안나 슈미트 폴란드 가족및 사회 복지 담당 차관은 폴란드는 지금까지 우크라이나 난민들을 위해 약 24억 즐로티(5억 5천만 달러)를 지출했다고 강조했다. EU 측도 폴란드의 대 우크라 정책이 크게 바뀔 수 있다고 깊은 우려를 양측에 전달했다. 

물론, 갈등을 봉합하려는 노력도 없지 않다. 올레그 니콜렌코 우크라이나 외무부 대변인은 페이스북에 “폴란드 주재 대사가 문제 해결을 위한 건설적인 방안을 폴란드 외무부 측에 제시했다"며 "서로 감정은 접어둘 것"을 촉구했다. 

우크라이나 전문가들은 폴란드의 총선 이후 양측의 갈등이 눈에 띄게 줄어들 것이라는 기대섞인 전망을 내놓는다. EU의 수입금지 조치 해제 결정도 폴란드의 향후 대응에 영향을 미칠 것으로 본다. 

문제는 총선이 아직 한 달 가까이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그 사이에 양측의 감정 대립이 격화하면, 총선 후 화해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리거나, 앙금을 남길 수 있다. 폴란드에는 반우크라이나 정서가 여전하고, 양국이 유럽 시장 개척에서 경쟁자라는 점도 무시할 수 없다. 폴란드가 잠재적으로 최대 경쟁 상대인 우크라이나의 EU 가입에 고추가루를 뿌릴 수도 있다.

아레스토비치 전 우크라 대통령실 고문/사진출처:페북

이를 의식한 우크라이나 정가에서는 정부 당국에 '속도 조절'을 요구하는 목소리도 나오기 시작했다. 한때 우크라이나 대통령실의 '입'이었던 알렉세이 아레스토비치 전 고문은 역사적 기억을 더듬으며 "이럴 바에야 아예 100년 전(폴란드와 우크라이나 서부 공화국간의 전쟁/편집자) 처럼 폴란드에 전쟁을 선포하라"고 농담을 던진 뒤 "폴란드와의 갈등을 벌이는 지도부의 행동을 '정치적 자살'"이라고 규정했다. 

양국 갈등을 계속 심층적으로 다뤄온 스트라나.ua는 21일 "현재의 위기가 키예프-바르샤바 관계에 어떤 피해를 입혔는지 파악하려면 폴란드 총선까지 기다려봐야 한다"며 "'폭풍'이 10월까지 계속된다면, 상황이 정치인·전문가들의 현재 기대 수준보다도 더 나쁘다는 것"이라고 지적했다. 나아가 젤렌스키-두다 대통령이 다시 공개적으로 포옹을 한다고 하더라도, 글로벌 시장에서 경쟁 관계라는 근본적인 대립 요인은 사라지지 않고, 상당기간 양국의 주요 정책 방향에 영향을 미칠 것이라고 주장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