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U의 가입 협상 권고에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는 우크라이나의 딜레마
EU의 가입 협상 권고에 마냥 좋아할 수 만은 없는 우크라이나의 딜레마
  • 이진희 기자
  • jhman4u@buyrussia21.com
  • 승인 2023.11.10 06:2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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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연합(EU) 행정부 격인 집행위원회는 8일 채택한 '2023년 EU 확장 패키지' 보고서에서 27개 회원국으로 구성된 이사회(정상회의)에 우크라이나의 가입 협상 개시를 권고했다. 집행위는 지난해 6월 우크라이나에 가입 후보국 지위를 부여할 당시 제시한 총 7가지의 사전 개혁 요건 가운데 4개 분야에 대한 개혁이 완료됐다며 권고 이유를 설명했다. 

우크라이나 매체 스트라나.ua와 외신에 따르면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은 이날 기자회견에서 "집행위가 가입 협상 개시를 오늘 이사회에 권고했으니, 내달 중순(12~15일) 이사회에서 (개시 여부에 관한) 정치적 결정을 내릴 것"이라고 전망했다. 

우르줄라 폰데어라이엔 EU 집행위원장/사진출처:소셜미디어 X(옛 트위트)

젤렌스키 우크라이나 대통령은 "우크라이나와 유럽의 역사가 옳은 걸음을 내디뎠다"며 "12월 EU 이사회의 정치적 결정을 기대한다"고 환영했다. 

◇ 10년 전으로 되돌아간 우크라 역사

이날 집행위의 권고로 우크라이나는 사실상 러-우크라 전쟁의 태생적인 시발점으로 여겨지는 '유로 마이단'(2013년 시작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반정부 시위) 이전으로 되돌아갔다. 당시 우크라이나의 친서방 야권은 EU와의 협력 협상(이후 EU 가입 협상 수순/편집자)을 거부한 야누코비치 전 정권에 대한 반대 시위를 벌였고, 진압 과정에서 유혈사태가 벌어지면서 야누코비치 전대통령은 러시아계 주민이 많은 돈바스 지역(도네츠크주와 루간스크주)를 거쳐 러시아로 도피했다. 이후 야누코비치 정권 축출 시위는 '유로마이단'(유럽+광장)으로 불린다.

지금부터 10년 전, 우크라이나의 EU 협력 협상 자체가 못마땅했던 러시아도 그 사이에 많이 달라졌다. 2014년 크림반도의 병합과 우크라이나 동부(돈바스 지역)의 친러시아 세력 지원, 2022년 특수 군사작전(우크라이나 전쟁)을 통해 우크라이나 흑해 연안 벨트 4개 지역(도네츠크, 루간스크, 자포로제, 헤르손주)를 러시아 연방에 가입시킨 뒤, 우크라이나(실제로는 우크라이나 서부 지역)의 EU 가입 여부는 그들의 선택이라고 한 발 물러선 상태다. 다만 군사안보조직인 나토(NATO) 가입에 대해서는 끝까지 강력하게 반대하고 있다.

러시아 연방에 편입된 우크라이나 동부 4개 지역. 위로부터 루간스크, 도네츠크, 자로포제, 헤르손주, 그 아래는 크림반도. 사실상 흑해 연안 벨트지역이다/텔레그램 캡처

좀 심하게 말하면, 우크라이나는 앞으로 서부 지역이 EU 가입을 통해 EU 회원국으로, 동부 지역은 러시아 연방 편입에 의해 러시아로 쪼개질 전망이다. 유엔 헌장은 불법적인 국경및 주권의 변경을 금지하고 있지만, 체코슬로바키아가 체코와 슬로바키아로, 유고연방은 1990년대 세르비아 등 6개 국가로 분할된 바 있다. 유고의 경우, 긴 내전을 거쳤다.

우크라이나라고 우크라이나계 주민의 서쪽과 러시아계 주민의 동쪽으로 쪼개지지 말라는 법은 없다. 미국 등 서방 진영의 마음에 안 들 뿐이다. 

◇ EU 가입을 위한 우크라이나의 과제

어쩌면 '동서 분할'의 또다른 출발선에 새롭게 선 우크라이나에게 EU 가입의 관건은, 아직 미해결됐다는 3개 분야의 개혁 여부다. 부패 척결과 정경유착 탈피를 위한 로비 관련 법안 정비, 소수민족 언어 보호 문제다.

스트라나.ua는 9일 "EU가 우크라이나에게 희망의 몸짓을 안겨주었다"면서 "동시에 완수해야 할 개혁 과제를 조건으로 제시했다"고 지적했다. 가장 어려운 과제는 소수민족의 언어 문제를 해결하라는 요구다.

그 기준은 지난 6월과 10월, '소수 민족에 관한 법률'(이하 소수 민족법)에 관한 '베니스 위원회'(법치를 통한 유럽의 민주주의 이행 위원회/편집자)의 권고다. 베니스 위원회는 지난 6월 "우크라이나가 소수민족 언어의 사용을 확대해야 한다"며 "특히 '미디어에 관한 법률'에서 언어 할당량을 폐지해 소수 민족 언어의 미디어 접근권을 제한하지 말 것"을 권고했다. 

이에 우크라이나 최고라다(의회)는 지난 9월 '소수 민족법' 개정안을 채택했으나 곧바로 베니스 위원회로부터 비판을 받았다. 러시아어 사용에 대한 5년 제한이 너무 길다는 것이다. '소수민족법' 개정안은 러시아어를 '침략국 언어'로 규정한 뒤 계엄령 기간은 물론, 계엄령 폐지 후 5년간 소수 민족의 언어(자격)에서 배제하기로 했다. 우크라이나 체류 러시아인도 계엄령 기간과 폐지 후 6개월간은 법의 보호를 받지 못하도록 했다. 

그러나 EU 집행위원회는 이 문제에서는 유연한 입장을 표명했다. 한 EU 고위 관리는 '유로뉴스' 측에 "우크라이나의 EU 가입 협상을 시작하기 위한 기준으로 러시아어 상황을 고려하지 않고, 교육과 언론 등의 분야에서 헝가리와 루마니아 등 다른 소수 민족 언어의 권리 보장 문제만 따질 것"이라고 말했다. 

우크라이나의 현실적인 고민은 다른 데 있다. 러시아어 사용 문제는 EU 가입을 위한 형식적 차원을 떠나 이미 우크라이나 내부에서 실존적 문제로 떠올랐기 때문이다. 

스트라나.ua에 따르면 소련 시절의 유명한 고려인 로커인 '빅토르 초이(최)' 노래(러시아어)를 부른 길거리 가수에 대한 충돌을 시작으로, '러시아어를 사용한다'고 비판한 승객의 탑승을 거부한 키예프(키이우) 택시 운전자 사건,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우크라이나 군인은 우크라이나 군인이 아니다'라고 주장한 전 의원의 발언 등을 놓고 우크라이나 내부에서는 찬반 논쟁이 격렬하다.

길거리에서 빅토르 최 노래(러시아어)를 부른 길거리 가수. 결렬한 찬반 논쟁을 불렀다/사진출처:스트라나.ua

스트라나.ua는 "러시아어 사용 문제는 전쟁 전만 해도 주로 정치인들이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용했던 것과는 달리, 이제는 일반 시민들도 그 논쟁에 참여하고 있다"며 "앞으로 우크라이나 사회에 큰 영향을 미칠 수 있는 급진적인 변수가 될 것"이라고 지적했다. 

◇ 러시아어 사용 찬반 대충돌?

찬반 논쟁을 전(全) 국민으로 확산시킨 이는 이리나 파리온 리보프(르비우)폴리텍 대학(Львовская политехника)교수(전 의원)이다. 그녀는 "우크라이나어 사용을 요구하는 승객을 강제로 하차시킨 키예프 택시 운전사를 처벌해야 한다"며 "러시아어를 사용하는 사람들은 우크라이나군에서도 배제시켜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나아가 우크라이나 민족주의 성향의 '아조프(아조우) 연대'에 군무하는 병사도 러시아어를 사용한다면, "우크라이나인으로 간주하지 말 것"을 주장했다. 

택시 운전자에 대해 비판적이던 많은 오피니언 리더들이 파리온 전 의원을 가혹하게 비판했다. '(우크라이나군의 전력을 약화시키려는) 친러시아적 발언'으로 매도하기도 했다. '러시아어를 쓰든, 우크라이나어를 쓰든 최전방에서 목숨을 바쳐가며 국가를 방어하고 있는데, 무슨 X소리냐'고 비아냥거리는 소리가 '아조프 연대'는 물론, 각급 부대에서 터져 나왔다. 우크라이나 당국도 부정적인 입장을 취했다. 

이리나 파리온 전 의원/사진출처:페이스북

우크라이나어 쓰기 캠페인은 전쟁과 함께 시작됐다. '당신이 애국자라면 우크라이나어를 쓰라', '러시아어는 적의 말이다'; '러시아어를 쓰는 우크라이나인은 없다' 등의 캠페인이 정부의 지원을 받아 본격화했다.

문제는 상당한 계층에서 거부 반응이 나타나기 시작한 것. "내가 편한 러시아어를 쓰는데, 왜 간섭이냐"는 반응이 가장 먼저 나왔다. 뒤이어 '이제는 쓰는 말까지 제한하느냐'는 '사생활 침해' 비판이 제기됐다. 특히 최전선에서 복무중인 러시아어 사용 군인들이 크게 반발했다. '러시아어를 쓰기 때문에 애국자가 아니다"라는 후방의 비난은, '큰 모욕'이라고 반박했다. 

키예프 국제사회학연구소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우크라이나인의 45%가 우크라이나에서는 언어에 따른 차별이 존재한다고 응답했다. 

스트라나.ua는 "이같은 상황은 앞으로 우크라이나 사회에 심각한 모순을 야기할 것"이라며 "전쟁이 끝난 후에는 언어 문제가 훨씬 더 강하게 들리기 시작할 수 있다"고 우려했다. 차기 대선(정상적으로는 내년 3월)에서 이 문제가 폭발할 수도 있다. 러시아가 점령한 우크라이나 4개 지역에서는 우크라이나어 사용 강요가 우크라이나와 더욱 멀어지게 하는 요인이 될 가능성도 높다. 특히 러시아계 주민이 많이 사용 돈바스 지역과 크림반도가 그렇다.

◇ 길고도 험한 EU 가입 협상 

EU 본부/텔레그램 캡처

EU 정상회의에서 '가입을 위한 협상 개시' 결정이 내려지더라도, 그 시간이 얼마나 걸릴지 아무도 장담할 수 없다. 터키의 EU 가입 협상은 2005년(현재 동결 상태), 몬테네그로는 2012년, 세르비아는 2014년, 알바니아는 2020년에 시작됐다. 이들 국가 중 EU에 가입한 국가는 아직 없다. 유고 연방에서 독립한 크로아티아은 협상 시작부터 EU 가입까지 장장 8년이 걸렸다.

다만, EU는 지난 2020년 EU 가입 협상 절차를 일부 변경했다. 협상이 만족스럽지 못할 경우 협상을 중단하거나 종료할 수 있고, 이후 특정 영역에서 협상을 다시 시작할 수 있도록 했다.

현재 협상이 진행중인 나라들과 달리, 우크라이나에게는 조건이 하나 더 있다. 어쩌면 가장 핵심적인 사항인지도 모른다. 우크라이나 전쟁의 종식이다. 전쟁 중인 국가는 EU에 가입할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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